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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쉼터 = 멕시코민요 "제비"와 "체게바라" 추모페이지
글쓴이 : ansantour 날짜 : 2011-02-20 (일) 13:49
조영남 - 제비.mp3 (4.9M), Down : 1, 2011-02-22 11:33:51




<IFRAME height=438 src="http://serviceapi.nmv.naver.com/flash/convertIframeTag.nhn?vid=D8A473D806B2EC0FEDAACF4B3A1BECD8B897&outKey=V126542a102ffb23c0620a4eb149253d51af52eeb1947ddbe1ebaa4eb149253d51af5" frameBorder=no width=720 scrolling=no></IFRAME>




Caetano Veloso

이 노래는 부르는 사람마다 가사가 조금씩 다름니다.
개략적인 뜻으로는 빼앗긴 조국에 남아 있는
속수무책 상태의 처지를 비관하는 노래입니다. 

노래는 "트리오 로스 판쵸스"입니다. 



아래는 한국가수 조영남이 가사를 바꾼
"제비"의 노래곡 내용입니다.
안산투어는 "-"표의 가사를 새로 개사해
제비 원곡의 의미를 더욱 살려내고자 합니다.

안산투어가 개사한 노래가사 "제비2"입니다.


* 본 가사는 일제하 조국해방전쟁(독립군)을 기념하고,
남북통일 이후의 북방영토 수복의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

-조국1만리 수복전쟁을 위해 죽을 수 없다면 후손이 아니다.-  
-----------------------------------------------


(조영남 개사)정답던 얘기 가슴에 가득하고
(안산투어 개사)-내조국 남쪽 꿈에도 생각나니

푸르른 저 별빛도 외로워라
-뛰놀던 내 고향이 그립구나

사랑했기에 멀리 떠난님을
-조국을떠나 해방의 날 그리니

언제나 모습 꿈속에 있네
-떠나온 내형제 아른거리네

먹구름 울고 찬서리 친다해도
-내비록 죽어 생명이 다하여도

바람따라 제비 돌아오는날
-해방되는 그날 돌아오리니

고운 눈망울 깊이 간직한채
-고국 산천에 꽃이 만발한 날

당신의 마음 품으렵니다
-내조국 땅에 묻히고싶어

-
아 아 그리워라 잊지못할 내님이여
-아 내 조국이여 보고싶은 내형제여

나 지금 어디 방황하고있나
-나 지금 비록 산천을 헤메나

-
어둠뚫고 흘러내린 눈물도
-새벽별이 지고나면 기어이

기다림속에 잠 들어 있네
-찾아오리라 내 조국 해방

-
바람따라 제비 돌아오는날
-사랑하는 내땅 부모형제와

당신의 사랑 품으렵니다
-해방의 노래 함께부르세



La Golondrina(제비-멕시코 민요)
 

우리나라에서 조영남님이 번안하여 부른 "제비"는
안타까운 석별의 정을 표현하는 멜로디로서 원곡의 가사는
망국의 한을 담아놓은 노래입니다.

스페인 출신 `나르시소세라테르`가 작곡하였지만
후에 멕시코로 넘어와 간략히 줄어들면서
현재의 노래가 되었고 현재 스페인어권 국가들을 중심으로
세계 곳곳에서 애창되는 멕시코 민요입니다.

 



Trio Los Panchos

A donde ira veloz y fatigada 
la golondrina que de aqui se va.
Mas si en el viento se hallara extraviada
buscando abrigo y no lo encontrara?
지친 몸으로 황급히 날아가는 저 제비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바람 속에서 길을 잃어 피할 곳을 못 찾고 있는 것일까? 


Junto a tu reja le formara su nido
en donde pueda la estacion pasar
Tambien yo estoy en la region perdida
oh Cielo Santo, y sin poder volar!
창가에 둥지를 틀면 거기서 이 계절을 보낼 수 있겠지.
오 신이여,  빼앗긴 땅에서 머물고 있는 저도 날아갈 수가 없답니다!




'제비'(La Golondrina)/Caterina valente의 원곡

여기를 떠나가는 제비는 아, 혹시 바람속에서 쉴 곳을 찾다가
길을 잃었나아니면, 쉴 곳을 찾지 못하나?

내 침대 곁에 그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리
그 곳에서 계절을 보낼 수 있으리라 나도 역시 이곳에서
길을 잃었네.
오, 하느님 날을 수도 없습니다.

나 역시 사랑하는 조국을 떠났네,내가 태어난 집도..
나의 삶은 오늘도 방황하고 고뇌스러우며
이제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네

사랑하는 제비야, 방황하는 여인이여
당신을 나의 가슴으로 안으리라 당신의 노래를 들으리라
다정한 제비여
나의 조국을 생각하며 나는 눈물을 흘리네


 난 신을 믿지 않는다 오직 인류만을 믿는다 억압과 착취가 없는 유토피아(이상향)를 꿈꿧던 영원한 혁명가의 최후 체게바라 멕시코 험준한 산악을 배경으로 전개된 치열한 생과사 의추격전 이념도 국가도 가족도 친구도 상관없는 볼리비아 외딴 산골 가시나무 듬성듬성한 불모지의땅 조그만 바위에 기대어 최후를 맞이한 혁명가의 주검위를 가리웠던 가시 나뭇가지 잔해와 함께 흙먼지 스산한 계곡으로 석양이 물들면서 가슴속을 후비는 처절한 외로움과 슬픔에 음악으로 전해지던 "제비" 그영상의 잔영으로 인해 끝내는 하얀 밤(30대 초반)을 세우게 했던 추억의 음악 그리고 망국의 한을 담은 "제비"의 원곡을 들으면서......
여러분과 함께 시간여행을 떠납니다

                         체게바라를 기리며 2010년 9월 추석에........

                                                          - 천 등 산 -

 

체 게바라
출생 1928년 6월 14일(1928-06-14)
아르헨티나 산타페 로사리오(Rosario)
사망 1967년 10월 9일 (39)
볼리비아 라 이게라(La Higuera)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년 6월 14일 ~ 1967년 10월 9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사회주의 혁명가, 정치가, 의사, 저술가, 쿠바의 게릴라 지도자이다. 원래 이름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문화어: 에르네스또 체 게바라)이다. 



인류의 정의가 영원히 그리워하는 진정한 민족혁명가

체 게바라 (Che Guevara)



 체 게바라로 더욱 잘 알려진 에르네스토 게바라(ERNESTO GUEVARA ; 1928-67)는 라틴 아메리카의 게릴라 지도자이자 혁명이론가로서 1960년대의 좌익급진주의자들의 영웅이었다. 아르헨티나의 로사리오에서 중산충 가정 출신으로 1953년에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University of Buenos Aires)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오직 혁명만이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1954년에 멕시코로 가서 그곳에 망명하고 있던 쿠바의 혁명지도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와 합류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는 카스트로의 게릴라전쟁을 도와 마침내 쿠바의 독재자 바띠스따(Fulgencio Batista)를 축출하는데 성공한다.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은 후에는 쿠바의 산업부 장관(1961-1964)을 역임하였다. 제3세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에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카스트로 정권의 反美-親共 노선을 열렬히 옹호하였다. 게바라는 게릴라전쟁에 관한 두권의 책을 썼는데, 여기에서 농민이 주동이 되는 혁명운동이 후진국의 살길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는 1965년 쿠바에서 사라졌다가 그 이듬해 볼리비아의 반군 지도자로 나타났다가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붙잡혀 1967년 10월 9일 발레그란데(Vallegrande) 근처에서 총살되었다.

체게바라가 정부군 보초병에게 했던 마지막 말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오직 인류만을 믿는다." 

 


 

목차

[숨기기]

[편집] 생애

[편집] 유년기

전통 가우초 복장을 하고 말을 탄 5세 게바라, 1933년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바스크-아일랜드 혈통의 중산층 가정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에두아르 라파엘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와 무신론자였던 어머니 셀리아 데 라 세루나 Y 죠사는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으나 진보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1] 또한 1824년에 시몬 볼리바르,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 등 라틴 아메리카 해방군과 아야쿠쵸에서 싸운 페루 부통령 호세 드 라셀나의 후예이고 경제적으로 풍족한 가정이었다.

미숙아로 태어난 게바라는 폐렴에 걸려 2세 때 심한 천식을 앓는다. 그의 부모님은 아들의 건강을 우선 시하여 천식 치료에 좋은 환경을 찾아 몇 번이나 이사를 했다. 어렸을 때는 경련을 동반하는 천식 발작에 위기에 빠진 적도 많았으며, 그 때마다 산소 흡입기를 사용하여 회복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럭비 같은 격렬한 스포츠를 사랑했으며, 발작할 때는 산소 흡입기를 사용하며 경기에 돌아오곤 했다. 그의 중증 천식은 그를 평생 괴롭혔다.

[편집] 사춘기

17세의 게바라, 1945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에서 의학을 배웠다. 재학 중이던 1951년에 나이 많은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오토바이로 남미를 돌아 방랑 여행을 경험하였다. 이 때 남미 각 나라의 상황을 견문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나타난 민중에 대한 억압과 착취의 현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으며, 마르크스 주의에 공감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토바이 남미 여행 일기》에 기록되어 나중에 이것을 원작으로 한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도 제작되었다). 이 여행을 계기로 게바라는 평범한 의사에서 혁명가로의 첫 의식 변화가 이루어졌다.

1952년에 볼리비아 인민운동에 참가하여 외국자본의 국유화에 반대하였다. 1953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의학대학을 졸업한 후 25일만에 친구 카를로스 페레로와 함께 다시 남미 방랑 여행을 떠난다.

[편집] 청년기

후안 페론의 독재정권 하에 있던 아르헨티나를 떠나 당초 베네수엘라 구라나도를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볼리비아 혁명이 진행되는 볼리비아를 여행하면서, 그때까지 억압을 받아왔던 인디오가 해방되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후 페루, 에콰도르, 파나마,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를 여행하고 하코보 아르벤스 그스만 시대 포프리스모(사회주의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정권 하에 있는 과테말라에 도착했다.

[편집] 과테말라

22세의 게바라, 1951

과테말라에서 의사를 계속하다가 조국 페루에서 쫓겨나 과테말라에 망명하고 있던 여성운동가 《일다 가데아》와 만나 교감하여 사회주의에 급속히 눈을 뜨고, 그녀와 결혼한다.

1950년 10월의 선거로 성립된 과테말라 아루벤스 정부는, 스페인 식민 시대부터 지속된 구조화된 수탈과 오랜 독재 부패 정권에 의해 유린된 사회의 개혁을 진행하고 있었다. 미국기업(유나이티드 프루츠사)의 착취에서 경제적 독립을 달성하고, 과테말라의 농업 자본주의 경제 확립을 위해 마야계 인디오의 복권을 시도하였다. 그때까지 착취만 당하였던 소작농에 대한 농지 분배 등 과테말라 혁명이라 불릴 정도의 급진적인 개혁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루벤스 정권이 유나이티드 프루츠 사의 사유지에 손을 쓰면서 미국 정부는 과테말라를 맹비난 하였다. 게바라는 이 정부의 활동을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 평했다. 그러나 군부의 배신으로 CIA가 밀어준 반정부 세력 '까스띠요 아르마스'에 의해 아루벤스 정부가 전복되면서 (PBSUCCESS 전략), 민주 선거로 선출된 과테말라 정통 혁명 정권은 붕괴되었다. 이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게바라는 무력에 의한 라틴 아메리카 혁명을 진심으로 지향하게 됐다.

[편집] 멕시코 망명

그 후 새로 집권한 아르마스 정권에 의해 게바라의 암살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아내 가데아 함께 실망과 분노를 안고 멕시코로 망명했다. 1955년 7월 이곳에 망명 중인 반체제 쿠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 만난다. 7월 26일 쿠바 후르헨시오 바티스타 독재 정권 타도를 목표로 동료들을 인솔하고 있는 카스트로에 공감하게 되었다. 게바라는 이때, 하룻밤 사이에 반 바티스타 무장 게릴라 투쟁에 참여를 결심했다고 한다. 이렇게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의 생존자였던 《알베르트 바요》 중령에 의한 본격적인 군사 훈련을 받고, 쿠바 상륙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편집] 혁명가

노새를 탄 게바라, 1958년 11월

그는 아내와 딸 이루디다를 멕시코에 남겨두고 혼자서 쿠바로 향한다.

1956년 11월 25일, 피델 카스트로를 반군 지도자로 하여 총 82명이 8인승 레저 보트 "데셈바르코(그란마)"에 탑승하였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이 타서 위생 등의 환경이 열악하였다. 또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폭풍 속에 출발했기 때문에 7일 후 12월 쿠바에 도착했을 때 많이 지쳤고, 사기도 떨어져 있었다. 반군의 상륙 계획을 카스트로가 미리 발표하였기 때문에 그 내용이 쿠바 정부에 유출되어 반란군은 도착 직후부터 정부군의 습격을 받아 괴멸 상태가 되었다. 결국 살아서 도착할 수 있었던 사람은 82명 중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라울 카스트로, 카밀로 시엔후 에고스, 루이스 크레스포, 호세 모얀, 훌리오 디아즈, 카리스트 가르시아, 카를로스 베르데무스 등 12명뿐이었다. (생존자가 17명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카스트로는 혁명에 실패하여 감옥살이를 했었는데, 재판 당시 피델 카스트로는 판사 앞에서 〈역사가 나중에 나를 다시 평가할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한다. 체 게바라등의 동지들의 참여로 다시한번 혁명에 도전하여 친미성향의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붕괴시킨다.

상륙 후, 반군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 잠복하여, 산골 마을을 전전하면서 군 재건을 도모했다. 이후 쿠바 국내에서 활동하던 반정부 세력과 합류에 성공하여 반군 세력은 점차 강화되어 갔다. 당초 부대에서 게바라의 역할은 군의관이었지만, 혁명군의 정치 방송을 하는 라디오 방송국(라디오 레베르데)을 설립하는 등 정부군과 전투에서 그 인내심과 성실, 상황 분석, 냉정한 판단력,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점차 반군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도착 1년 후 병력 증가에 따른 부대 개편 시, 카밀로와 라울 등을 그대로 두어, 카스트로부터 제 2군(이름은 제 4군) '코만단테'(사령관, 지휘관 아래에 분대와 분대를 지휘하는 "대장"이 있다)에 임명되어 지휘권과 소령의 계급을 받아 카스트로에 이어 명실상부한 반군 이인자가 되었다.

1958년 12월 29일에 제 2군을 이끌고 쿠바 제 2의 도시 산타클라라에 돌입한다. 많은 시민의 가세로 적들을 제압하고 수도 아바나로 가는 길을 열었다. 1959년 1월 1일 오전 2시 10분 후 르헨시오 바티스타가 도미니카 공화국에 망명하자, 1월 8일 카스트로가 아바나에 입성하여, 쿠바 혁명이 달성되었다. 투쟁적인 업적과 헌신적인 작업으로 쿠바 시민권을 부여받아 쿠바 새 정부의 각료가 되기에 이르렀다.

[편집] 정치인

체 게바라, 1959년 1월 2일

그는 쿠바혁명 승리후 쿠바 공산당쿠바 혁명정부의 중요직책에 있으면서 쿠바혁명에서 얻은 것들을 지키며 혁명을 더욱 전진시키기 위하여 정력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사형제를 부활시켜 친미또는 반혁명세력 약14,000명을 죽였였다.[2] 쿠바혁명 승리 후 얼마간 아바나의 라 까바니아 요새수비대 사령관으로 있다가 산업발전을 조종하는 책임자로 있었으며 동시에 토지개혁의 준비에 참가하였다. 1959년 11월∼1961년 2월에 쿠바국립은행총재, 1961년 2월부터 쿠바산업부장관도 함께하였으며 1962년에 쿠바통일혁명조직 전국지도부 및 비서국에서 일하여 '쿠바의 두뇌'라 일컬어졌다.

[편집] 사망

그는 쿠바에서 많은 일들을 했음에도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났다. 1965년 4월,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행방이 묘연해졌다.[3] 이 때 쿠바를 벗어나 볼리비아로 투쟁무대를 옮겨 바리엔토스 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으나, 1967년 10월 9일 미국이 가세한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잡혀 총살당했다. 그의 시체는 30년후 볼리비아에서 발굴되어 그가 혁명가로 활동했던 쿠바에 안장되었다.[4]

[편집] 평가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 혁명 당시 사상적 동지인 볼리비아 공산당의 지원과 지역주민들의 적극적 지지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반정부혁명을 벌였다. 결국 게릴라전에 패해서 볼리비아군에게 사살당하고 말았다.

체 게바라는 사후에 전 세계적으로 '체 게바라 열풍'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 이유로서 쿠바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도 이를 박차고 또 다른 혁명을 위해 헌신하는 숭고한 모습이 사람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5]하지만 체 게바라는 반혁명 세력과 가담하지 않은 농민콩고볼리비아에서 수많은 농민들을 죽였고 당시 쿠바에 살았던 사람들은 체 게바라를 ‘아바나 백작’이라고 붙었다..[2]

[편집] 저서 및 관련 매체

짐 피츠(Jim Fitzpatrick)의 체게바라 초상화
  • 《Che의 일기》, 거리문학제, 1997
  • 《라틴 여행 일기》, 이후, 2000
  • 《체 게바라 평전》, 실천문학사, 2000
  • 《먼 저편》, 문화산책, 2002
  •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황매, 2005
  • 《체 게바라 자서전》, 황매, 2005
  •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실천문학사, 2008

[편집]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그는 1950년대 공부를 마치기 전에 오토바이 여행을 하였다. 이 여행은 억압받고 가난한 그리고 한센병으로 고통받는 인디오들과 민중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기회였다. 당시의 이야기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로 저술되었고,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라는 영화로 제작, 2004년에 개봉되기도 하였다.

[편집]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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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주석

  1. 시공디스커버리 99권《체 게바라》/장 코르미에 지음/은위영 옮김/시공사
  2. 테러&테러리스트:체게바라/영국 BBC/
  3.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4. 32년 만에 유해로 귀환, 《한겨레21》, 1997.10.9.
  5. ‘민중혁명가’체 게바라를 따르라, 《동아닷컴》, 1997.7.10.

[편집]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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