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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읽기] 한국공군의 F-4도입과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글쓴이 : ansantour 날짜 : 2011-07-12 (화)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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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40년 전,1969년 8월 31일, 국내 주요 신문은 아래와 같은 기사를 크게 실었다.

팬텀F4D “팬텀기 6대 인수.
세계 네 번째 보유 어제 환성 속에 축하비행”
-공군 OO 기지에서 유지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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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성금 헌납기.... 이제는 사라진, 당시의 방위성금으로 구입한 항공기라는 뜻. 얼만큼 돈을 모아야 비행기를 살 수 있었을까?  사실은 월남전 파병의 댓가로 받은 미국 원조가 주 자금원이며 아마도 방위성금의 일부가 포함되었으리라...>


미그 잡는 도깨비[Mig Killer]로 불리던 하늘의 도깨비 F-4D 팬텀기 6대가 29일[1969년 8월29일] 오전 9시 55분 아침 햇살이 찬란한  우리의 영공에 태극 마크를 달고 그 웅자를 나타냈다.
지난 주초 미국 멕그게란 기지를 떠나 1만2천 킬로미터의 태평양을 횡단,멸공의 임무를 띠고 새 임지인 한국에 날아왔다.
한국 공군은 이날로 미국 영국 이란에 이어 세계 네 번째로 팬텀기 보유국이 된 것이다.
상공에서 대기 비행 중이던 00대의 F5A편대가 하늘의 왕자 팬텀기를 맞아 얼룩 무늬로 단장된 팬텀 편대를 가운데 놓고 상하 좌우로 환영 비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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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문 보도가 있던 날 팬텀기를 미국에서 몰고 한국에 온 팬텀대 지휘관 강신구 중령은 왕년의 영화배우 신성일[실명 강신영]씨의 친형이다. 사진에 부인의 사진 바로 옆에 신성일이 보인다. 당시로는 지금의 비 보다 더인기있었던 영화배우였다>

그가 팬텀대를 이끌고 도착했던 대구 기지에 신 성일 씨가 환영 나갔던 사실도 보도가 되었었다.
이때 강 신구[姜信求]중령[35.조종간부 6기]이 조종하는 팬텀 1번기가 널찍한 날개를 상하로 서너번 흔들면서 답례를 했다.
팬텀 편대의 좌우로 거리를 좁힌 F-5A편대는 기지 지상 통제소의 지시에 따라 에스콧 비행에 들어갔다.
10시 35분 목적지인 00기지 상공에 나타난 팬텀기는 지축을 흔드는 폭음과 함께 삽시간에 기지 상공에 저공으로 가로 지르며 하늘로 다시 치솟았다.
육중한 생김새와 재빠른 움직임이 지상에서 기다리던 관중의 시야에 처음 드러냈을 때 환영식장에선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10시 48분 빅토리의 머리글자인 V자 대형을 그리며 기지 동쪽 활주로에 진입한 팬텀기 6 대는 차례로 터치 다운했다.
지상에 닿을 때마다 팬텀의 후미에서 퍼져 나온 낙하산 모양의 감속 장치가 목화송이처럼 아름답게 퍼졌다.
드디어 ‘라인 업‘, 케노피가 열리면서 강중령을 선두로 헬멧을 벗어들고 만면에 웃음 띈 채 조종사들이 내려서자 김성룡 참모총장은 굳은 악수로 이들을 차례로 맞이했다.
팬텀기를 맞은 이날 공군00기지에는 임 충식 국방장관 문 형태 합참의장,맥기히 미5공군 사령관 등 한미 고위 장성들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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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의 F-4D가 대구기지에서 정열하여 환영식을 한다. 한국 공군으로서는 다소 운영 능력에 부담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2008년경의 시간당 운영 유지비는 거의 500만원을 한다. 당시 우리 경재 능력으로 50드럼이나 들어가는 기름값을 대는게 싶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세계에서 네번째로 보유하는 엄청난 자부심과 북한에 대한 우월감을 가질수있는 좋은 기회였다.>


40년 전 가난한 이 나라가 거금을 들여서 사들인 팬텀기는 60년대의 의심할 바 없는 세계 최강의 전투기였다.
일본도 독일도 이스라엘도 가져보지 못했던 그런 초고가의 최신형 전투기를 그 때 아시아의 빈국 한국이 도입했다는 것은
지금으로 따져 보면 미얀마나 이티오피아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나라가 F15 스트라이그 이글 전투기를 도입했다는
것 이상으로 쇼킹했던 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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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상공을 비행중인 F-4E. F-4E는 F-4D의 개량형으로 78년에 도입하게된다.>

팬텀은 미 해군기로 개발되었지만 그 예상을 깬 막강했던 성능으로 미 공군에 채택했던 범상치 않던 경력이 말해주듯 공중 전투나 육상 폭격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고 그 전투력은 월남전에서 이미 충분히 입증했던 환상의 전투기였다.
항속 거리도 길었고 음속의 2.4배나 되는 빠른 속도에 2차 세계 대전 때 미군의 4발 중폭격기 B-17과 같은 폭탄 적재량등, 팬텀을 능가할 전폭기가 그 당시 세계에 없었던 만능의 폭격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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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최신 전투기는 미국이 그 때까지 했던 것처럼 한국에 거저 주던 낡은 군사 물자가 아니었다.
월남전이 격화 되어가면서 미국은 이미 월남에 맹호부대와 청룡부대를 파병했던 한국에 일개 사단의 추가 파병을 요청하였다.
67년도에 미국의 사이러스 반스 특사와 한국의 최규하 외무장관이 합의 했던 것은 미국이 한국에 일 억달라를 국군 현대화 자금으로 제공하고 한국은 보병 일개 사단을 추가 파병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 뒤 월남에 파병되었던 국군 보병 사단이 백마부대였다. 그러니까 초고가의 최신 전투기 팬텀은 그저 주어진 선물이나
군사 원조 무기가 아니라 한국의 젊은이들이 이국 땅에서 흘릴 피의 대가였다.
일억 달라는 그 당시로서 엄청난 액수의 거액이었다. 불과 그 2 년 전인 65년도에 한일 수교를 하고 일본에서 받은 무상 배상액이 3억 달라였다. 3억 달라는 아무 것도 없었던 한국이 경제 개발을 향해 시동을 걸 때 종자돈으로 적지 않게 유용하게 썼다고
할만큼의 거액의 규모였다.
이 거금을 바라보며 고장 많은 구식 장비에 애를 먹던 한국군의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는 물론이고 경찰까지 침을 삼키며 로비를 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심사숙고 끝에 대부분을 신형 전투기 F4D 팬텀기를 구입하기에 투입하기로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 운영 기술의 하나는 상황을 정확히 읽어내고 한국의 빈약 했던 물적 자원을 집중 투입해서 승부를 거는 것이었다. 즉 선택과 집중의 기술에 능한 것인데 크게는 그의 집권 초기는 경제 부흥을 위해서 수출 산업에 집중했었고 후기에는 국가의 명운을 걸만큼 중화학 공업육성에 집중 했던 사실을 들수가 있다.
그가 일본으로부터 받은 청구권 자금의 삼분지 일을 포항 제철에 투자해서 근대화의 초석을 닦은 것이나 미국으로부터 받았던
거금인 일억 달라를 목돈 풀어서 푼돈 만들지 않고 집중해서 팬텀기를 구매함으로서 가장 유효한 전력화로 연결한 것도
이런 선상에서 볼 수있다. 그 때 이군 저군 원하는 대로 나누어 줬으면 이도 저도 아닌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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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은 미리 국방장관에게 이 돈의 사용처에 대해서는 자기가 알아서 할 테이니 그리 알라는 지시를 내려 놓은 터였다.
그는 결국 국방 장관에게 팬텀기 1개 대대 [18대]와 비행장 개선비로 500만 달러를 쓰고 나머지 3,200만 달러는 육해군과 해병대 경찰들이 알아서 나누어 쓰라고 지시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팬텀기 구매 결정은 한국 국방사에 기록해 둘 최선의 무기 구매 또는 획득의 결단이었다.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서 구입하는 무기 구매는 비즈네스에서 기업인들의 투자와 같다.
잘하면 투자금을 다 회수하고도 막대한 이익을 남기는데 비해서 잘못하면 투자금 회수는 커녕 만회하기 힘든 큰 손해를 보고
패가망신을 면치 못한다.
거대한 예산을 써야하는 국방 무기를 잘 사면 그것은 국가 위기시 국토 수호의 최고 주역을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국방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면서 막대한 국민의 세금 낭비만 애물 단지 노릇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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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상공의 F-4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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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기는 중고 구식기를 운영하던 한국 공군의 질적 수준을 대폭 업그레이드 시켰다. 그러나 그런 수준만이 아니었다.
팬텀 기의 도입은 그때 한국 사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팬텀 기의 도입 보도는 우리 국군 발전사에서 계속 있어 왔던 다른 신형기들의 보도들과 다른 의미를 가지도 있다.
예로서 그 뒤 F16이나 F15를 도입 할 때도 메스컴은 이렇게 흥분했던 감정으로 대대적인 보도를 하지 않았었고 국민들은
역시 팬텀이 올 때처럼 열광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5,60년대의 한국의 사회 안팍에 안개처럼 떠돌았던 것은 무력감과 열등감과 도피감이었다.
그래도 60년대에 들어와서 경제개발이 발동이 걸렸고 잘 살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이 점점 가시화되기 시작한 때가 이 팬텀기가 들어올 때이다.
일본도 대만도 가지지 못했던,세계 최첨단 전투기를 우리도 미국이나 영국 같은 선진국들처럼 보유 할 수도 있다는 긍지를 주었고 국민들의 사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 후 국방 관련 홍보물이나 보도에 팬텀기 이상 더 많이 출현했던 인기 주연 스타는 없었다.
오죽했으면 한국 공군이라는 앞에 팬텀 공군이라는 수식어가 20년 가까이 붙어 다녔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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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한국 공군은 미군이 쓰다가 넘겨준 6.25때의 전투기 F86을 아직도 다량 가지고 있었다. F86세이버 - 한국 전쟁 공중전에서 주역을 했지만 너무 낡아서 한국 공군은 정비 유지에 큰 애로를 겪었다.>


여기에 당시 60년대 후반 한국은 실질적으로 북한 김일성의 잦은 도발로 준전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국민들은 있을수 있는
북한군의 남침 가능성에 항상 불안에 떨어야 했다.
국민들은 그 무렵의 북한 전투기가 500기가 넘었었고 한국 공군의 전투기는 150기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팬텀의 도입은 그런 불안감을 일소함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박대통령이 결단을 내린 팬텀의 도입은 전략적 항공 공격력을 한국이 보유하게 됐다는 점을 제일 크게 평가해야 할 듯하다.
F-86은 20살이 다 되어가는 구식 전투기이고 압록강까지 겨우 가서 20여분 머무르고 돌아 와야 하는 구식 전투기였다.
그러나 팬텀은 북한 전역은 물론 중국의 북경까지도 그 유효한 공격거리 안에 가지고 있는 전폭기였다. 홍위병들이 맹위를 떨치던 중국에서도 오로지 미군만이 갖는 이런 장거리 공격력을 가진 국가가 이웃에 나타난 것이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다.
전략 무기의 의미는 적의 공격 의지 사전 억제라고 한다. 북한의 김일성은 팬텀기가 들어오기 일 년 전에도 월남식의
게릴라 전을 꿈꾸며 무장 간첩을 120여명이나 울진 삼척으로 보냈었던 남한 적화에 대한 불치의 과대 망상증을 앓고 있던 자였다. 그런 그가 남한의 급속히 성장하는 경제력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서 군 현대화를 해나가는 남한이 이제는 침략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을 공격 할 가능성도 배제 못할 군사적 강국으로 커가는 것을 느꼈을 수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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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을 상징하는 모자쓴 도깨비... 기체 일련번호의 68은 68년에 생산됨을 의미한다.지금까지 42년을 비행하였다는 것...>

불치의 남한 적화병을 앓던 김일성에게 그때까지 이 팬텀기의 도입처럼 충격을 준 남한의 최신 무기 도입은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팬텀이라는 전투기가 자신들이 보유했던 최신 전투기 미그21을 월남 상공에서 박살냈던 가공할 전폭기였다.
어쨌건 팬텀이 들어 오고,그리고 팬텀 때문만은 그런 것이 아니겠지만 그 뒤에 김일성의 남한 도발은 상당히 소규모화 했고 조심스러워졌다. 이스라엘은 한국보다 한 달 늦은 1969년 9월 팬텀을 도입했다.
한반도에서 팬텀은 이런 실전의 무대 주인공 역할을 할 기회는 주어지지는 않았었다.
==> 위 내용은 인터넷의 한 블로그(어디서 가져온지는 기억이 안납니다 죄송) 에서 내용을 가져오고, 사진을 재구성하였다.
      하지만 F-4D 도입에는 또다른 비화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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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사관학교 청주 상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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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전투 비행단 대구 기지의 F-4D와 F-15K. 최신예 기종과 최 노후 기종이 나란히 하고있다. F-4D는 2010년 6월을 기점으로 모두 전력의 뒤안길로 물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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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속의 비행장. 대구기지. 1930년 일본이 건설한 대구 비행장은 아직도 일제가 만든 시설이 일부 남아있다. 대구는 k-2 비행장으로 잘알려져있다. K 씨리즈는 미군이 붙여준 비행장 명칭으로 오래된 비행장일수록 숫자가 낮고, 새로 생긴 비행장은 번호가 뒤이다. 실제 대구의 성장에는 K-2 근무하는 군인의 봉급이 큰 역할을 했다. 정부의 돈이 그대로 흘려 지방의 경제에 사용된다. 하지만 이제 대구시민은 K-2 이전을 주장하면서 소음문제를 해결하고, 고도제한을 풀어 부동산 가치가 높아지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내눈앞에서 사라지길 원하지만 어딘가는 다시 지어야하는 이기지는 도대체 어디로 갈것인가? 우리나라 어디를 가던 누구도 반대하는 기지의 이전을... 대구기지는 F-86, F-4D, F-16, F-15등의 신기종 도입시 마다 전력화를 한 특이한 기능의 기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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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n이 장착되지않은 F-4D는 별도로 건포드를 배 아래면에 장착하고 건을 사격한다. 대구기지는 1980년대 말까지 미군 F-4E 2개 대대가 주둔하고있었으며, 이들 항공기는 모두 한국에 싼 가격으로 판매(군사 잉여물자 판매)하게된다. 그 비행기들은 현재 청주에서 운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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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공군의 RF-4C. 기본적으로는 F-4D와 동일한 기체구조를 가지고있다>


과연 미국이 F-4D를 순순히 주었겠는가?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지만 매우 신빙성있는 이야기를 하고자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에 수차례나 팬텀기 도입의사를 밝혔지만 미국은 한국은 팬텀을 운영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 중국을 자극할 우려가있다, 박정희는 자칫 북을 공격할 수있는 인물이다. 북에 팬텀이 넘어갈 경우 막대한 군사 비밀이 유출된다 라는 이유 등으로 계속 거부를 한다. 지금의 F-22 수출을 거부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봐야하나? F-22는 기술이전을 우려하것이기도 하지만 여하튼 미국은 무조건 다 파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1968년에 1. 21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이 터지고 이후 1월 23일 미국 프에블로 정보 수집 군함이 북한에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한다.(아래 책자 내용 참조) 청와대 기습사건시에는 미국이 아무런 군사적 조치도 안하고 묵묵 부답이다가,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에서는 미국이 발칵 뒤집혀지고 항모를 파견하고 전쟁 준비까지 돌입한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의 그러한 2중적 행동에 더 화가나서 미국을 맹 비반하고 나선다. 미국의 입지가 북한에 당하고, 남한에 당하고, 집요한 박정희 대통령의 월남 파병과 병행한 조이기를 통해 결국 F-4D의 도입을 성사 시키게된다.
하지만 미국은 F-4D에 부여한 핵무기 운반 능력은 제거를 하고 한국에 판매(?)하였으며, 그외 성능은 달리 달라진 것은 없다.



=================== 참고 푸에블로 사건 =====================
푸에블로호 나포와 미국의 굴욕

내가 2003년 10월 평양에 들어가 대동강을 지날 때 안내원이 강변의 배 한 척을 가리키며 '푸에블로호'라고 알려주었다. 1968년 1월 23일 북녘 강원도의 원산항 앞바다에서 북한 해군초계정에 나포되었던 미국의 정보수집함 (intelligence ship) 푸에블로 (USS Pueblo ).
아마 남북한이 ‘간첩’들을 상대 지역에 가장 많이 보냈을 때가 1960년대였을 텐데,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게 1968년 1월 21일의 이른바 ‘청와대 기습 사건’ 또는 ‘1.21 사태’일 것이다. 북한에서 잘 훈련된 30여명의 무장침투조가 “박정희의 목을 따기 위해” 청와대 근처까지 접근해서 남한 군경과 교전을 벌이게 된 사건이다. 참고로 이 때 유일하게 붙잡힌 김신조를 통해 북한 특수부대인 ‘124부대’의 실상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그에 맞서 남쪽에서도 김일성을 죽이기 위해 특수부대를 만들었으니 몇 해 전 화제를 모았던 영화 [실미도]의 ‘684부대’다.
남쪽의 유엔군사령부가 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이에 대해 북한측에 항의하기 위해 3일 뒤인 1월 24일 판문점에서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를 갖기로 했는데, 회의가 열리기 하루 전인 1월 23일 미국에게는 더욱 심각한 푸에블로호 사건이 터졌다. 한반도에 전운이 감도는 상황에서 초현대식 전자 시스템을 갖추고 북한군의 동태를 정탐하던 미국 정보함이 북한군에 나포되어버린 것이다. 세계에서 제일 강한 미국 해군함정이 나포된 것은 해군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도 소련이나 중국 같은 큰나라가 아닌 “3등국도 못되는 북한”에 의해서. 게다가 그 배에는 미해군 장교 6명과 사병 75명을 포함해 83명이 타고 있었으니 미국에게는 자국민들의 목숨까지 달린 사건이었다.

1. 푸에블로호 나포에 따른 북미 협상
이 사건의 내막은 미국 국무부가 2000년 비밀 해제한 외교문서를 편집하여 출판한 자료집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4-1968, Volume XXIX, Korea에 “푸에블로 위기”라는 항목으로 약 300쪽에 걸쳐 자세히 드러나 있다. 그리고 당시 미국의 국제관계 담당 고문으로 유엔군사령부에 소속되어 북한과의 판문점 협상에 직접 참여했던 한국계 미국인 이문항 (미국명 James M. Lee)씨가 2001년 남한에서 펴낸 [JSA-판문점 (1953-1994)]에도 짤막하게나마 잘 다루어져 있다. 이 두 가지 자료를 요약하여 아래에 소개한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미국 국무부는 즉시 남한과 소련의 미국대사관에 전보를 보냈다.
남한 정부에게는 미국이 유엔군사령부와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의지를 전하며 남한 군부가 청와대 기습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북한에 대해 어떠한 적대 행위도 하지 말도록 충고하고, 소련 정부에게는 미국 함정과 승무원들이 빨리 풀려날 수 있도록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부탁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국가안전보장회의 (NSC)를 열어, 외교적으로는 유엔과 우방국들을 통해 북한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군사적으로는 북한을 폭격하거나 봉쇄하든지 또는 공해상에서 북한 선박을 나포하거나 격침시킬 수 있는 가능성 등을 논의했다. 북한이 미국 함정을 나포했으니 남한으로 하여금 소련 함정을 나포하도록 하는 게 “가장 균형 잡힌” 방안이라는 기막힌 발상이 나오기도 했다.

이에 대해 남한 정부는 국가 원수가 죽을 뻔했던 청와대 기습 사건에 대해서는 미국이 거의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다가 미국 정보함을 나포한 사건에 대해서는 즉각 대응을 준비하는 게 불만스러웠다. 대통령을 살해하려고 한 데 대해 북한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며 보복하고 싶던 차에 미국도 당했으니 미국이 화끈하게 폭격이라도 해주기를 기대했는데, 협상을 통해 사건을 처리하려는 것도 못마땅했다. 게다가 미국은 남한을 빼고 북한과 1대1 비밀 협상을 벌이고자 했으니, 남한 정부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분통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미국은 한미방위조약에 따라 남한의 안보를 강화하고 군사 원조를 늘리겠다는 약속으로 박정희 정권을 달랠 수 있었다. 한편, 소련은 자신들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며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 때문에 한반도에서 긴장이 생기고 있으니 미국이 직접 북한과 대화하라고 대꾸했다.

여기서 뜻밖에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난다. 1968년 1월 23일 죤슨 대통령이 참석한 국가안보회의가 시작되자마자 한 달 뒤 물러날 맥나라마 국방부장관이 후임자인 클리포드 국방부장관 지명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이다. “우리는 의도하지 않게 캄보디아를 침략하게 되었다. 수소폭탄 4개를 실은 B-52 폭격기 한 대를 잃었다. 정보함 한 척이 북한에 나포되었다.” 이 문서는 당시 최고 극비 문서로 분류된 것으로, 대개 비밀 외교문서들을 공개할 때는 핵무기 배치나 사용 계획 등 민감한 부분에 관해서는 삭제하는 게 관례인데 “수소폭탄 4개를 실은 B-52 폭격기 한 대를 잃었다 (We lost a B-52 with four H-bombs aboard)”는 문장이 잘리지 않은 것은 국무부 사료실 직원들의 실수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아무튼 덕분에 원자폭탄보다 훨씬 파괴력이 큰 수소폭탄을 4개나 실은 폭격기까지 베트남전쟁에 동원했던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쏟아부은 폭탄의 양은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된 폭탄보다 더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핵무기까지 쓰려했으니 정말 끔찍스런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은 베트남으로 향하던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USS Enterprise)호와 두 척의 구축함을 원산 앞바다 근처로 파견하는 한편 핵폭탄을 탑재할 수 있는 B-52 전략폭격기와 F-105 전투폭격기 수십대를 미국과 일본에서 “남한 정부에 알리지도 않고” 오산과 군산 공군기지로 옮겼다. 북한이 의도했던 대로 된 셈이랄까. 왜냐하면 북한은 미국의 베트남 침략에 맞서 베트남을 돕기 위해 모든 가능한 노력을 다하겠다고 공언했던 터였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1966년 10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은 추종국이나 [남조선] 괴뢰 군대까지 투입해서 베트남을 침략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침략을 반대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은 그저 정치적 지지나 보낼 뿐 군대를 보내서 미국과 맞서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로동당과 조선 인민들은 베트남 인민들의 투쟁을 자기 자신들의 투쟁으로 간주하며, 베트남 인민들을 돕기 위해서 모든 가능한 노력을 다하겠으며, 베트남 정부가 요청하면 우리는 지원군을 보내서 참전할 것이다. 미국은 그 어느 추종국보다 먼저 남조선 군대를 수만 명이나 월남에 파병해서 전투에 참가하고 있다.
사실 그랬다. 미국의 베트남 침략에 대해 미국의 양심 세력과 온 세계가 반대하고 저항하는 가운데 미국은 오로지 남한을 끌어들여 끝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다른 우방국들은 미국의 요구에 마지못해 베트남 땅에 깃발만 꼽아놓은 꼴이었는데, 남한은 베트남 파병을 자청하고 나섰으니 미국엔 그야말로 봉이었다. 실제로 박정희는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지 꼭 6개월 뒤인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하여 케네디 대통령에게 한국군을 베트남전쟁에 보내고 싶다고 몇 차례 간청하다시피 제안했는데, 케네디는 아직 그럴 때가 아니라고 대꾸했다. 1963년 케네디가 죽자 1964년 초 박정권이 다시 베트남 파병 의사를 전했지만, 죤슨 행정부는 한일 국교정상화 추진에 지장을 초래할까봐 조심스러워 했다. 박정권이 베트남 정부와 직접 접촉을 시작하자, 미국은 1964년 5월 처음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파병을 요청했다. 6월에 한미 양국이 합의하기를 의료지원단과 태권도교관들을 보내기로 했는데, 박정권은 여전히 전투부대까지 보내고 싶다고 간청했지만, 9월 130명의 의료지원단과 10명의 태권도교관들이 1차로 베트남에 들어갔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1965년부터 끊임없이 남한의 파병을 요구하게 된다. 미국이 남한을 얼마나 염치없이 몰아붙였으면 1966년 2월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가 국무부에 다음과 같이 항의하다시피 했겠는가.
우리는 남한에 소수의 의료지원단을 요구해서 수백명을 지원받았다. 우리는 그보다 훨씬 큰 비전투부대를 요청해서 2,000명을 지원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전투사단을 요구해서 20,000명을 지원받았다. 잠시도 지나지 않아 우리는 더 많은 여단과 사단을 요청했는데, 약 30,000명을 지원받을 것 같다. 이제 한국인들이 이에 대한 결정을 굳힐 시간조차 주지 않고 그들에게 10,000명을 더 보내달라고 요구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러한 요구는 언제 끝날 것인가.... 이렇게 되면 약 60,000명의 한국군들이 베트남에 머무르게 되는데, 한국을 빼고는 실질적으로 유일한 참전국인 우리 미국보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2-3배 더 많은 것이다.

이런 터에 북한의 청와대 기습이나 푸에블로호 나포는 남한 군대가 베트남에 추가로 파견되는 것을 막고, 베트남으로 향하던 미국 핵 항공모함과 구축함들의 방향을 한반도로 바꾸도록 만들었으니, 미국과의 전쟁을 무릅쓰고 “베트남 인민들을 돕기 위해서 모든 가능한 노력을” 한 셈이다. 앞에서 소개한, 유엔군사령부에서 일하던, 이문항씨의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이 베트남을 돕겠다고 공언했던 1966년 10월부터 비무장지대 주위에서 북한의 무장침투 및 공격이 급증했다. 1967년에는 미군 2사단 막사를 폭파시키고 유엔사 전방기지 구역 안에서 작업하던 미군 공병단 막사를 공격하는 등 북한의 침투가 114회에 이르렀는데 69회의 무장공격에 의해 미군 16명과 남한군 115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1968년 한 해는 한국 휴전 기간 중 가장 격렬한 해로 비무장지대 안팎에서 181건의 심각한 사건들이 발생했다”고 하는데, 이 사건들 대부분 미군이나 남한군을 한반도에 묶어놓음으로써 베트남을 돕기 위한 무력시위가 아니었을까.
참고로, 난 2000년 10월 일본 [평화의 배]에 올라 강연을 하며 베트남 다낭에 있는 호치민박물관을 견학할 기회를 가졌는데, 다낭은 1965년 미군들이 처음으로 상륙하여 베트남에서는 가장 큰 육해공군 기지를 설치했던 곳으로, 박물관의 거의 모든 전시실은 미군들과의 투쟁에 관한 자료나 미군들에 의한 양민 학살에 관한 자료로 메워진 것 같았다. 그 가운데 한 전시실에 들어섰다가 커다란 태극기를 앞세우고 다낭에 상륙하는 남한군들의 사진이 벽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옆의 전시실에는 북한 지도자들이 미국 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맞서 싸우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베트콩)을 격려하는 편지가 크게 확대되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묘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아무튼 푸에블로호 사건과 관련하여 미국과 북한은 1968년 2월초부터 판문점에서 비공개 협상을 갖기 시작했는데, 미국은 그 배가 북녘 해안에서 약 16마일이나 떨어진 ‘공해’상에 있었고, 대낮이었기 때문에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은 1%도 되지 않는다며, 즉시 승무원들과 군함을 되돌려달라고 항의도 하고 위협도 했다. 이에 맞서 북한은 그 첩보선이 원산항 앞의 여도로부터 약 8마일 떨어진 ‘영해’에 불법으로 침입하여 북한군의 동태를 염탐했다며, 미국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것을 주장했다. 협상 중에 미국 대표가 북한이 청와대 기습 사건이나 푸에블로호 나포 같은 “침략적 도발 행위”를 중단하라고 큰소리로 요구하자, 북한 대표는 책상을 치며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당신은 지금 조선 사람인 우리가 조선에서 침략 행위를 한다고 떠벌리고 있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지금 어디에 와서 누구와 마주 앉아 있는지나 알고 함부로 입을 놀려대고 있는 것입니까? 이곳은 미국이 아니고 조선의 판문점입니다. 당신들은 우리가 초청해온 손님도 아니며 우리나라에 찾아온 관광객도 아닙니다. 당신들은 우라나라에 불법적으로 기어든 침략자입니다. 당신들은 20년이나 우리나라 절반 땅을 강점하고 조선의 통일을 가로막으면서 민족 분열을 강요하고 있는 조선 인민의 불구대천의 원수입니다.... 이제는 미국의 전문적인 무장 간첩선 푸에블로호까지 끌여들여 우리나라 영해를 침범하고 노골적으로 우리 공화국을 도발하고 나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제 침략자들은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을 계기로 광란적 전쟁 소동을 벌이면서 남조선과 공화국 북반부 동해안 일대에 수많은 침략 무력을 집결시켜놓고 공화국을 침공하겠다고 떠들고 있소. 오늘날 영웅적 조선인민군과 무장한 전체 조선 인민은 당신 등 미제국주의자들의 어떠한 도발이나 침공에도 대처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바라지 않지만 결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신들 침략자들의 도발은 징벌로, 보복은 보복으로, 전면 전쟁은 전면 전쟁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이에 앞서 북한은 나포 이틀만에 푸에블로호 함장이 북한 영해를 침범하여 정탐 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자백했다고 그가 자백서에 서명하는 사진과 함께 공표했는데, 미국은 그게 고문에 의한 자백일 것이라며 승무원들이 돌아온 뒤 객관적인 조사를 실시하여 미국의 잘못이 인정되면 ‘유감의 뜻’을 표명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이 먼저 ‘사과’하면서 앞으로는 영해 침범을 하지 않겠다고 ‘담보’해야만 승무원들을 돌려보낼 수 있다고 못박았다.

미국은 이 사건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했지만 결의안도 채택하지 못한 채, 북한과 판문점을 통해 1년 가까이 지루하게 실랑이를 벌이다가 얕은 꾀 한 가지를 생각해냈다. 북한이 만들어준 사과문에 대각선으로 승무원들을 돌려받는다는 문장을 집어넣고 바로 그 밑에 서명하겠다는 것이었다. 북한이 주장하는 영해 침범과 불법 정탐 행위를 인정하는 게 아니라, 승무원을 인수한다는 자체만 인정하겠다는 술수였다. 처음에는 미국의 의도를 몰라 그냥 넘어갈 듯하다 미국의 속셈을 뒤늦게 알아차린 북한 대표는 노발대발하며 사과문에 진정으로 서명할 용의가 있을 때 회의장에 나오라고 소리쳤다.

미국은 다시 꾀를 짜냈다. 사과문 끝에 승무원들을 인수한다는 문장을 집어넣고 서명하되, 서명하기 직전에 그 사과문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부정하는 성명을 발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4년 전에 써먹었던 수법과 비슷한 것으로, 1964년 미군 헬기가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 영공에 들어갔다가 격추되었는데, 미국은 북한에 대해 정탐을 하고 북한 영공에 불법 침입을 한 범죄를 인정하며 앞으로는 그런 범죄 행위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보장한다는 문서에 서명한 뒤 다음날 이를 공개적으로 부인했던 적이 있다. 아마 북한은 미국이 사과문에 공식적으로 서명한다면 말로 부인한다는 게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느냐 싶어 이 옹색한 제안을 받아들인 것 같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푸에블로호가 나포된지 정확하게 11개월 만인 1968년 12월 23일 미국은 다음과 같은 사과문에 서명하고 승무원 82명과 시체 1구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물론 서명 직전 미국 대표는 “이 문건에 서명하는 유일한 이유는 인도적인 견지에서 승무원들을 돌려받기 위해서이지, 북한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사과문의 내용에 서명하는 것은 아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 앞

.... 미국 함선 푸에블로호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령해에 여러 차례 불법 침입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중요한 군사적 및 국가적 기밀을 탐지하는 정탐 행위를 이 함정의 승무원들의 자백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 대표가 제시한 해당한 증거 문건들의 타당성을 인정하면서, 이 미국 함선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령해에 침입하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반대하는 엄중한 정탐 행위를 한 데 대해서 전적인 책임을 지고, 이에 엄숙히 사죄하며 앞으로 다시는 어떠한 미국 함선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령해에 침입하지 않도록 할 것을 확고히 담보하는 바입니다.... 본 문건에 서명하는 동시에 하기인은 푸에블로호의 이전 승무원 82명과 시체 1구를 인수함을 인정합니다.
미합중국 정부를 대표하여, 미 육군 소장 길버트 우드워드
1968년 12월 23일

비록 미국이 진심으로 사과한 게 아니라는 성명을 발표하긴 했지만, “미국 역사상 최초로” 사과문에 서명했다는 자체가 미국으로서는 몸서리칠만한 치욕이었다. 그러고도 함정과 거기에 설치된 비밀 전자 장치는 끝내 되돌려받지 못했으니 그 때문에 암호 체계를 완전히 바꿔야 하는 엄청난 손실도 당했다. 미국은 그 때까지 어느 나라에든지 해안에서부터 3마일까지를 국제법상 영해로 인정하고 있었고, 설사 어느 선박이 다른 나라의 영해를 침범하더라도 해당 국가는 그 선박에게 영해를 떠나도록 요구하는 게 국제법상 유일한 권리라고 주장해왔는데, 미국이 받들어온 국제법이 무너지게 되었으니 위신이 말이 아니었다. 또한 1960년대 미국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대외정책을 세웠었지만, 북한을 동등한 협상 상대로 대하지 않을 수 없었던 데다, 협상 과정에서 북한 대표로부터 “북한 (North Korea)”이라는 호칭 대신 공식 국호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라는 호칭을 쓰도록 “심각한 경고”를 받고 이를 쓰지 않을 수 없었으니, 북한을 제대로 인정한 셈이었다.

게다가 미국의 치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68년 11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공화당의 닉슨 후보는 “미국이 어떻게 3등국도 못되는 북한에게 그런 창피를 당할 수 있느냐”고 죤슨 행정부를 비난했는데, 그가 대통령이 된 뒤인 1969년 4월 15일 미국 해군 정보정찰기 EC-121이 동해쪽 북한 영공에서 미사일을 맞아 격추 당하고 승무원 31명은 모두 바다 속에 떨어져 죽고 말았지만 닉슨 행정부 역시 아무런 보복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닉슨 행정부는 그 정찰기가 북한 연안에서 40마일이나 떨어진 공해상에서 비행하고 있었다며 즉시 국가안보회의를 열어 북한에 대한 징벌 폭격을 검토했다.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가 다시 북한 근해로 급파되고,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때보다 더 많은 구축함과 폭격기들이 남한으로 들어왔지만, 결국 어떠한 보복도 하지 못한 채 그래도 북한에 대한 정찰 비행을 계속하겠다는 말로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얘기했듯, 시체 1구를 포함한 푸에블로호 승무원 83명은 북한 해군에 붙잡힌 지 꼭 11개월만에 풀려났는데, 부처 (Bucher) 함장은 남쪽으로 건너온 직후 열린 기자 회견에서, 푸에블로호는 한 순간이라도 북한 영해에 들어간 적이 없으며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구타와 학대를 당했다고 밝혔다. 승무원들이 주한미군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바로 미국으로 돌아간 뒤, 미국 해군 청문회는 2-3개월 동안의 조사를 통해 부처 함장, 해리스 (Harris) 정보 수집 책임 장교, 머피 (Murphy) 항해사 등을 군법회의에 넘길 것을 요구했다. 푸에블로호를 보호하고 방어하는데 실패한 점, 북한군의 명령에 따라 원산항으로 운항한 점, 승무원들에게 비밀서류를 파기하는 방법을 적절하게 훈련시키지 못한 점, 북한군에 붙잡혔을 때 비밀서류를 파기하지 못한 점, 그리고 그러한 비밀서류들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한 점 등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샤피 (Chaffee) 해군장관은 그들이 북한에 억류되어 있던 동안 이미 충분한 고통을 겪었다며 처벌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한편, 1968년 1월 미국 해군 첩보함이 북한에 나포당해 승무원 80여명이 억류된 데 이어 1969년 4월엔 미국 해군 정찰기가 북한에 격추당해 승무원 30여명이 목숨을 잃게 되자, 미국 의회는 한 가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국 군대의 배든 비행기든 사람을 태우면, 외국 군대에 의해 공격을 받거나 붙잡히지 않도록 적절한 보호 조치를 하지 않고는, 정보 수집을 위해 위험한 지역에 보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나아가 미국 군부는 푸에블로호 나포를 계기로 정보 수집 프로그램에 관한 종합 검토를 실시하여 그 배와 같은 유형의 첩보함을 이용한 모든 정보 공작을 중단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69년 말까지 그러한 종류의 첩보함들은 활동이 중지되고 첩보함들에 의한 정보 수집 프로그램은 완전히 끝났다. 푸에블로호 나포에 따른 타격과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덧붙여 푸에블로호 나포를 통해 미국이 입은 가장 심각한 손실은 막대한 첩보 유출과 아울러 암호 체계가 북한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었다. 중앙정보국과 국방정보국, 그리고 육해공군 정보 담당 대표들은 합동 정보팀을 만들어 별도로 조사를 벌였는데, 약 7000-8000에 이르는 비밀 문건들이 북한측에 넘어감으로써 공산권이 미국의 정보 수집 능력이나 방법 그리고 출처 등을 파악하게 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런데 이 결론이 사실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한 때는 사건 발생으로부터 약 17년이 지난 1985년 중반이었다. 미국 해군 안에서 암호를 풀어 읽는 방법을 포함한 각종 첩보를 소련측에 넘겨주던 간첩단이 발각되었는데, 미국은 그 때서야 소련이 1968년부터 미국의 암호를 해독하며 최고 비밀문서들과 통신 내용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된 것이다.

참고로 세계 최강의 미국이 “3등국도 못되는 북한”에게 바다에서는 첩보함을 나포당하고 하늘에서는 정찰기를 격추당하는 치욕을 당하면서도 보복은커녕 사과를 해야 했던 수모를 겪은 사실은 요즘 북한 핵문제와 관련하여 적어도 두 가지를 깨닫게 한다. 첫째, 북한이 무모하리만큼 미국에 맞서며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걸핏하면 자유를 지킨다는 핑계로 전쟁을 일삼아온 미국으로부터 폭격이나 침략을 당하지 않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미국에 맞설 수 있는 최소한의 무력을 지니는 것이라는 교훈을 북한은 자신의 경험과 이라크 전쟁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이 푸에블로호 나포와 정찰기 격추를 당했을 때 원산이나 다른 지역을 폭격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원산 지역에 집결해있는 북한 공군력이 상당해서 미국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둘째, 미국이 북한을 저토록 혐오하며 북한의 정당한 요구조차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데는 지난날 미국이 유일하게 북한에게만 겪었던 치욕과 수모에 따른 사무친 원한이 작용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온 세계를 제멋대로 주물럭거려온 세계 최강대국이 북한에게만큼은 맘대로 하지 못하고 오히려 끌려다니며 북한의 의도대로 협상을 타결하는 것은 양보가 아니라 패배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원산항에서 대동강변 쑥섬으로 옮겨진 푸에블로호

북한이 동해 원산항에 붙잡아놓았던 푸에블로호를 힘들게 그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서해쪽 대동강변 쑥섬으로 옮겨놓은 데는 기막힌 역사적 사연이 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터진 곳이 바로 쑥섬인 것이다. 1866년 7월 미국 상인이 중국 천진에 있던 영국 상선을 빌어 타고 황해도와 평안도 앞바다를 들락거리다가 대동강 입구에 닻을 내렸다. 상선이라고 하지만 갑판 위에 대포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서양인들은 장총이나 권총, 또는 창과 칼 등으로 중무장을 했으며 보트도 몇 척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은 보트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만경대 아래 쑥섬 옆 두루섬 앞까지 올라와 상륙한 뒤 부녀자를 능욕하기도 하고 그들을 감시하던 조선 병사들을 물에 던져 죽이기도 했다. 그러다 평양 인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양각도 아래를 거쳐 셔먼호로 돌아갔는데, 인민들은 평안감사 박규수의 지휘 아래 셔먼호를 불태워버렸다. 이에 관해 북녘의 역사책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1830년대부터 조선을 식민지로, 아세아 침략의 발판으로 만들려고 꾀하여온 미국 침략자들은 1866년 8월 드디여 무장해적선 ?샤만?호를 대동강에 침입시켰다. 해적들은 총포를 마구 쏘아 주민들을 죽이고 강변 마을들에 뛰여들어 강도질을 일삼았다. 놈들은 게다가 1,000석의 쌀과 많은 량의 금을 주면 돌아가겠노라고 터무니없는 요구까지 들고나왔다. 그것이 거절당하게 되자 담판하려고 간 조선 관리를 억류하는 등 온갖 행패를 다 부리였다. 이에 격분한 평양의 군민들은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주석의 증조할아버님이신 김응우 선생님을 선두로 하여 미국 침략선 ?샤만?호를 불살라버리였다.
셔먼호를 불태워버린 사건에 관해 남한의 역사는 ‘평안감사 박규수의 지휘’를 강조하는 데 반하여, 북한의 역사는 ‘김일성 주석의 증조할아버지 김응우의 지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1998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 주석의 만경대 고향집 해설 강사로부터 전주 김씨인 그의 12대 조상인 김계상이 전주에서 함경도로 이주했고 증조부인 김응우가 함경도에서 만경대로 이사했다고 들었는데, 셔먼호에 타고 있던 서양인들이 만경대 근처에서 행패를 부렸으니 만경대에 살고 있던 김응우가 셔먼호 방화 및 침몰에 어떤 역할을 했을 수 있다. 그러나 남쪽에서는 박규수의 보고를 비롯한 당시의 역사문헌에 김응우의 역할에 관한 기록이 없으니 ‘김일성을 미화하기 위한 역사 조작’이라고 단정한다.
아무튼 1866년 평양감영 소속 군인들과 만경대 근처 주민들이 셔먼호를 불태우고 격침시켰던 대동강변 쑥섬에 1966년 사건 100주년을 기념하여 격침비를 세웠다는데, 그로부터 2년 뒤인 1968년 동해에서 붙잡은 푸에블로호를 그 격침비 옆으로 옮겨다 전시해놓고 있다니 북한다운 대단한 발상이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비난하며 반미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장소와 소재가 기막히지 않은가. 내가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져오다 1998년 방문하여 널리 소개한 적이 있는 황해남도 신천박물관이 한국전쟁 중 미군들의 양민 학살을 소재로 반미사상을 고취시키는 곳이라면, 저기 쑥섬은 미국에 대한 승리로 반미사상을 고취시키는 곳이랄까.
그런데 쑥섬은 1980년대 말부터 북한의 유명한 사적지 겸 유원지로 가꾸어졌다고 한다. 옛날 쑥대와 잡초만 무성해 쑥섬이라 불리기 시작했다는 그곳은 1948년 4월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책, 홍명희, 최동오 등 남북의 정당 및 사회단체 인사들이 이른바 ‘남북 대표자 연석회의’를 끝내고, ‘지도자 협의회’를 가지면서 휴식을 취한 장소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섬 가운데는 당시 연석회의를 기념하여 회의에 참가하였던 정당 및 사회단체들의 숫자를 상징하는 56개의 화강석으로 이루어진 ‘통일 전선탑’도 세워져 있단다. 또한 그들이 장기를 두며 휴식을 취하던 원두막과 그들이 탔던 나룻배 등도 원상대로 복구해 놓았으며, 물놀이장 (수영장)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화 오락 시설들을 만들어 유원지로도 가꾸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푸에블로호를 언제 어떻게 동해 원산항에서 서해 대동강변으로 옮겼을까? 남쪽 같으면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니 동해에서 남해를 거쳐 서해로 옮기면 된다. 그러나 북녘은 동해와 서해가 연결이 되어 있지 않다. 동해쪽 영해에서 공해로 나가 남해쪽 공해를 돌아 서해쪽 공해를 통해 영해로 들어간 뒤에야 대동강변으로 진입할 수 있는 것이다. 북녘의 함정이 푸에블로호를 붙잡아매고 공해를 통과하면서, 특히 미국의 핵 항공모함까지 왔다갔다한다는 동해쪽 공해를 지나는 동안, 어떻게 미국에게 발각당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미국의 인공위성은 땅위에 있는 축구공 만한 물체까지 촬영할 수 있다는데 말이다.
이런 의혹 때문에 남쪽에서는 한 때 원산항에서 대동강까지 육로를 통해 옮겼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나돌기도 했지만, 그렇게 큰 함정을 어찌 육로로 운반할 수 있었겠느냐는 반론이 힘을 얻었다. 배를 분해해서 옮긴 다음 조립했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는데, 정보함이기 때문에 분해도 어렵고 재조립도 어렵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던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1968년 푸에블로호를 나포할 당시 7명의 결사대를 이끌었다가 요즘은 전시관으로 변한 그 배 위에서 해설강사로 일하고 있다는 ‘공화국 영웅’ 군관 박인호에 따르면, “(푸에블로호의) 마스터 안테나 등을 눕히고 철판을 둘러 위장해” 옮겼는데, “미국측은 도착후 3일만에 알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기는 1999년이었단다. [로동신문] (1999년 10월 27일)이 원산 앞바다에 있던 푸에블로호가 현재 대동강 충성의 다리 근처로 옮겨져 있는데 이는 김정일 총비서가 1998년 12월 지시한 데 따른 것이라고 보도한 데 이어, [조선중앙통신] (2003년 1월 20일)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조선의 수도 평양에 전리품인 미제의 무장 간첩선 푸에블로호가 있다. 이 간첩선은 주체 88 (1999)년에 미해적선 셔먼호의 격침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대동강 기슭으로 옮겨져 전시되였다.”

이 푸에블로호는 원산항에서 1995년부터 일반에 공개되기 시작한 것 같은데, 1999년 대동강변으로 옮겨진 뒤에는 단체관람이 조직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모양이다. [조선중앙통신] (2002년 1월 24일)에 따르면, 1999년 10월 푸에블로호에 대한 참관이 시작된 때로부터 2년 남짓한 기간 이곳을 참관한 사람들의 수는 무려 30만명에 이르렀단다. 특히 미국이 북녘에 대해 “무모한 강경정책”을 펴는 바람에 “조선반도의 정세가 또 다시 대결과 긴장 격화에로 치닫고 있던” 2001년에는 14만여명의 인민군 장병들과 각계층 인민들이 푸에블로호를 참관하였다고 한다.
한편, 북녘이 푸에블로호를 미국에 대한 승리의 상징 또는 ‘전리품’이라고 자랑하며 외국인 관광객들에게까지 보여주는 것은 미국의 심기를 얼마나 불편하게 만들까.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함정을 외국에 나포당했고, 1년 가까이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승무원들을 돌려받았는데, 그 흔적이 30여년이 지난 뒤부터는 온 세상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두어 해전에는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적이 있는 도널드 그레그가 평양을 방문하여 푸에블로호 반환 문제를 논의했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했다.
그래, 이젠 그 배를 미국에 돌려줘도 되지 않을까. 사실 지금까지 북한만큼 미국의 자존심을 손상시킨 나라는 없지 않은가. 속된 말로 그 만큼 미국을 가지고 놀았으면 충분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나라 사이의 적대 관계가 풀려야 할 것이다. 미국이 더 이상 북녘을 “악의 축”이니 “폭정의 전초기지”니 하며 갈등을 부추기지 않고 북녘과 진지하게 협상하면서 이른바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나아가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한다면, 북한이 저까짓 배 하나 돌려주지 못하겠는가.


<푸에블로 호는 북한에 전시되어 반미 교육장으로 사용된다>

[출처] 푸에블로호 나포와 미국의 굴욕 / 이재봉 |작성자 남쪽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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