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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료] 조국 대한민국의 오늘날이 있기까지..
글쓴이 : ansantour 날짜 : 2007-07-01 (일) 19:03
정통성 있는 정의로운 정부가 부를 때, 우리는 국가를 위해 죽을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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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청아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인터넷에 우리 나라의 정보 데이터베이스를 되도록 많이 구축하고자 했던 1995년에 학생대백과사전(국민서관 발행) 인명사전과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 나오는 위인을 참고하여 제작하였습니다. 본 페이지의 위인의 일대기 요약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국민서관 학생대백과사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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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


우리 민족의 시조, 고조선의 첫 임금. 천제 환인의 손자이며 환웅의 아들.
기원전 2333년 아사달(지금의 평양?)에 서울을 정하고 단군 조선을 세웠다.
단군에 관한 '삼국 유사'의 기록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하늘의 황제인
환웅이 인간 세상에 내려가 인간을 구원하고자 원하므로, 환인은 천부인(하늘 나라
왕의 표지)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가도록 허락하였다. 환웅은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의 신단수에 내려왔는데, 이 분이 환웅 천왕이다.
환웅이 360여 가지 일을 맡아 다스릴 때 곰과 범 한마리가 사람이 되게 하여 달라고
환웅에게 빌었다. 환웅은 쑥 한 줌과 마늘 20쪽씩 주면서,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먹으며 굴 속에 있던 중
범은 참지 못하고 도중에 뛰쳐나갔으나, 곰은 잘 참아 내어 37일 만에 여자로 변하였다.
이 웅녀가 아기 갖기를 원하자, 환웅이 잠시 변하여 웅녀와 혼인함으로써 단군을 낳게 되었다고
한다. 단군은 인간으로서 처음 왕이 되어 1500년 동안 고조선을 다스리다가 기자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 주고 아사달에서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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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 전58~전19(~동명왕 19)


고구려의 시조(재위 전37~전19). 성은 고, 이름은 주몽.추모.상해.도모.
동부여왕 해부루가 죽고, 금와가 즉위하였는데, 어느날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났다. 유화가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자기를 꾀어 내었기 때문에 부모에게서 쫓겨났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금와왕은 유화를 데려다 궁중에 가두었다. 그 유화가
햇볕을 받고 임신하여 알을 낳았는데, 그 알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이 사내아이가
곧 주몽이다. 주몽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씩씩하여 7세가 되자 활도 잘 쏘았다.
그러자, 금와왕의 일곱 아들과 신하들은 시기하여 주몽을 죽이려 하였다.
주몽은 유화 부인의 말에 좋아서 졸본부여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니, 이 나라가
곧 고구려이다. 기원전 36년에 비류국 송양왕의 항복을 받은 다음,
기원전 34년에 성곽을 쌓고 궁궐을 세웠다. 이어서 해인국을 정벌하고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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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조왕 ?~28(?~온조왕 46)


백제의 시조(재위 전 18~28). 고구려 시조 동명 성왕의 세째 아들.
동명 성왕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 유리(큰왕비의 아들)가 내려와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형 비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우려 하였으나, 도읍
문제로 의견이 엇갈렸다. 형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 충청 남도 아산군 인주?)로
가고,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지금의 경기도 광주?, 충청 남도 천원군 입장?)에 도읍을
정하고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다. 얼마 뒤 비류가 죽고 그 백성들이 위례성에 모여들자 나라 이름을 백제로 고쳤다. 기원전
5년 남한산으로 도읍을 옮기고, 9년 마한을 멸망시켰으며, 10년에는 아들 다루를 태자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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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혁거세 전69~4



신라의 시조. 왕호는 거서간. 전설에 의하면, 신라 6부의 하나인 사량부의 소벌공이 어느 날
숲속에서 말의 울음 소리를 듣고 다가갔더니, 그 자리에 커다란 알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알 속에서 어린 아이가
나왔다고 한다. 그 아이가 10여 세가 되자 기골이 빼어나고 총명하여, 의논한 뒤에 왕으로
삼았다고 한다. 기원전 57년 13세에 왕위에 올라 17세 때 왕비를 맞고, 왕비와 함께 전국을 돌면서 농사.양잠을
장려했다. 국호를 서라벌, 서울을 금성이라 정하고 궁성을 쌓아 국가의 기초를 세웠다. 사람들은
박과 같이 큰 알에서 나왔다고 하여, 박(박)이라는 성을 붙였고, 박이 또 세상을 밝게
다스린다는 뜻에서 혁거세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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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 대왕 375~413(소수림왕 5~장수왕 1)



고구려 제 19대 왕(재위 391~412). 고국양왕의 태자. 이름은 담덕. 12세 때인
386년 태자로 책봉되고 아버지가 일찍 죽자 17세 때에 왕위에 올랐다. 391년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영락'이라
함으로써 중국과 대등함을 보였다. 392년에는 백제 북쪽의 석현(지금의 재령 부근) 등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켜 한강 북쪽의
많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396년에는 친히 백제를 정벌하여 58성을 무너뜨리고 왕의
동생과 그의 대신 10여 명을 볼모로 잡아왔다. 이리하여, 한강 이북과 예성강 동쪽
땅을 완전히 차지하였다. 400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 명의 원군을 보내어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으며,
연나라의 모용희를 반격하여 신성.남소 등 두성 700여리의 땅을 갖게 되었다.
405~406년에 모용의 두 번의 침략을 받았으나 요동성. 목저성에서 모두 물리쳤다.
410년 (광개토 대왕 20)에는 동부여를 정복하고, 이어서 북부여를 무릎꿇게 하였다.
그리하여, 랴오허강 동쪽으로부터 중국 동북부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 하였다.
작은 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든 그는, 아깝게도 39세로 죽었다. 왕이 된 후
하루도 궁궐에서 편히 쉬지 못하고 전쟁터를 달려 배달 민족의 영웅으로서 높이 존경받고 있다. 그의
능은 자세하지 않으나, 414년에 장수왕이 만주 봉천 지안현 퉁커우에 세운 광개토 대왕의 능비에
그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묘호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호태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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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 ?~?



신라의 장군. 성은 김씨. 신라 17대 내물왕의 4대손. 512년 아슬라주(지금의 강릉)의
우두머리로서, 우산국(지금의 울릉도)를 공격할 때 나무로 만든 사자로 적을 위협하여 항복받았었다고 한다.
545년 (진흥왕 6) 국사 편찬의 필요성을 왕에게 건의하여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550년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싸워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두 나라를 공격하여 신라의 영토를 넓히는 데 공을 세웠다.
'삼국유사'에는 그의 이름이 박 이종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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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결 선생 ?~?



신라 자비왕 때 거문고의 명인. 경주 낭산 기슭에 살았다. 가난하여 누더기옷을 입었으므로 세상에서
'현순 백결'의 문자를 빌어 백결 선생이라고 하였다. 기쁨이나 슬픔의 모든
감정을 거문고 가락에 실어 세상의 근심을 잊곤 했다.
어느 해 섣달 그믐날, 이웃집에서 모두 떡방아 소리가 들리는데,
양식조차 없는 것을 아내가 한탄하자 거문고로 떡방아 찧는 소리를 내어
아내를 위로했다고 한다. 그 곡조가 후세에 전해져
'방아타령(대악)'이라고 일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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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 ?~660(?~의자왕 20)


백제의 제 31대 마지막 왕(재위 641~660). 의자는 왕의 이름이며, 시호가 없다.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632(무왕 33)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효성과 우애가 깊어 해동 증자로 불리었다. 왕위에 오르자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 등 40 성을 빼앗고, 윤 충을 시켜 대야성(지금의 합천)을
공격함으로써 성주품석 등을 죽게 하였다. 그 뒤 당항성.요차성을 공격하고 국위를
회복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만년에는 사치와 방탕에 빠져 성 충.흥수 같은 충신의 말을 듣지 않다가 660년 나.당
연합군의 침략을 받았다. 계백의 황산벌 싸움을 마지막으로,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자 태자와 함께 웅진성으로 피신하였다가
소정방에게 끌려가 당나라에서 병사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31대 678년 만에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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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 ?~660(?~의자왕 20)


백제 말기의 장군. 일찌기 벼슬길에 나가 달솔에 이르렀다.
660년 백제의 끝왕인 의자왕이 사치와 향락에만 빠져 정치를 소홀히 하자,
기회를 노리던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에 쳐들어왔다.
이 때 그는 백제를 구하기 위하여 5천 명의 결사대를 거느리고 황산벌(지금의
충청 남도 연산 들)에서 나.당 연합군과 맞서 싸웠다. 싸움터로 떠나기에 앞서,
이미 백제가 망할 것을 알고, '노예가 되는 것은 죽음보다 못하다.'고 말하며, 아내와 자식들을 손수
죽이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굳게 맹세하였다.
계백의 결사대는 김 유신의 군사 5만 명과 싸워 신라의 공격을 네 차례나 막아 냈다. 그리하여,
신라군이 사기를 잃고 있을 때, 신라 장군 품일은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으로
하여금 나가서 싸우게 하였는데, 관창은 백제군에게 사로잡혔다. 계백은 어린
나이로 용전한 관창을 기특히 여겨 살려보냈다. 그러나
관창은 다시 나와 싸우다가 또 붙잡혔다. 계백은 신라에 이같이 용감한 소년이
있느니, 싸움은 이미 승부가 난 것이라 짐작하였다. 그는 관창의 목을
잘라 그의 말 안장에 묶어 신라 군중으로 돌려 보냈다. 나이 어린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가
오른 신라군의 총공격을 받고, 그는 결사대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나라 위한 그의 충성과 용맹은 후세인들에게 큰 교훈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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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창 645~660(선덕 여왕 14~무열왕 17)



신라 무열왕 때의 화랑. 신라 좌장군 품일의 아들.
어려서 화랑이 되어 수련을 쌓아 15세 때에 이미 말타기.활쏘기에 능했다.
660년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칠 때 황산벌(지금의
충청 남도 논산군 연산)에서는 신라군과 백제군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이 때 백제의 계백 장군이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뛰어난 전략으로 대항해
왔다. 신라군은 용기를 잃고 여러 장군이 모여 걱정만 하자
관창이 나서서 싸우기를 자청하였다. 그러나, 장군들은
그가 나이가 너무 어려 들어 주지 않았지만 자기의
굳은 결심을 여러 번 주장하여 허락을 받고 적진에 뛰어 들었다가 사로잡혔다.
계백은 관창의 용맹과 나이 어림을 생각하여 살려 보냈다.
그러나, '결코 이기지 못하고 살아 돌아와서는 안된다.'는 아버지의 교훈을 생각하고
다시 적진으로 돌진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다시 잡혔다.
계백은 그의 용맹과 애국심에 감탄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목을 베어 그의
말 안장에 얹어 돌려 보냈다. 이를 본 신라 군사들은
크게 감동하여 백제의 5천 결사대를 무찌르고 승리를 거두었다.
싸움에 이긴 신라는 전사한 관창에 급찬의 관위를 내리고, 예의를 갖추어 장사지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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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595~673(진평왕 17~문무왕 13)


신라 시대의 장군. 김 수로왕의 12대손으로, 15세 때 화랑이 되었다. 629년 (진평왕
51) 아버지와 함께 고구려의 낭비성 공격에 참가했을 때,
홀로 적진으로 돌진하여 적장의 목을 베어 옴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더 높여 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644년 상장군이 되어서 백제에 빼앗겼던 일곱 성을 되찾았으며, 돌아올 때 백제군이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가 크게 무찔렀다. 647년 왕족인 신하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 반란군을 토벌하였으며, 진덕 여왕이 왕위에 있는
동안에도 백제의 공격을 잘 막아 냈다. 660년(무열왕 7) 상대등이 되고,
당나라의 소정방이 이끄는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68년(문무왕 8) 나.당 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서울인 금성에 남고,
김인문과 김흠순 등의 장군을 보내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세상을
떠난 뒤에 흥무 대왕의 칭호를 올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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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681(?~문무왕 21)


신라의 제 30대 왕(재위 661~681).
이름은 법민. 무열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명 왕후 김씨.
풍채가 좋고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650년 (진덕 여왕 4) 왕명을 받고 당나라에 가서 대부경의 벼슬을 받고, 귀국하여
병부령이 되었다가 655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김유신과 더불어 5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661년 무열왕의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올랐다.
662년에 나.당 연합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하려다 실패하였으나, 668년에 다시 고구려를
쳐서 함락 시켰다. 그런데, 당나라가 고구려.백제의 땅을 차지하려 하자,
김 유신으로 하여금 그들을 몰아내게 하여 677년 대동강.원산만에 이르는
그 이남 지역을 완전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당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여 의복.당악.역술을 본땄다. 676년(문무왕 16)의상을 시켜
경북 영주에 부석사를 짓게 하였다. 죽을 때 유언을 하여, 경상 북도 월성군 앞바다에
수중묘를 만들게 함으로써 동해 대왕암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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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 ?~?


신라의 중. 설총의 아버지. 불교의 통합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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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 704~787


신라의 중. 723년(성덕왕 22) 불교가 일어난 인도를 돌아보려는 큰 꿈을 품고, 바다를 건너
중국 남부의 항구 도시 광저우로 갔다. 거기서 인도의 중 금강지의 제자가 되어, 불법 공부와
함께 인도에 대한 공부도 하였다. 그 후, 인도차이나를 거쳐 인도 동해안에 도착하였으며,
부다가야를 비롯한 불교의 유적을 찾아 순례 여행을 계속하였다. 그가 쓴 '왕오천축국전'의 '
오천축국'이란
중천축.동천축.서천축.남천축.북천축을 말하며, 오늘날의 인도 대륙의 중부.동부.서부.남부.북
부에 해당되는 지역이므로, 인도 대륙을 두루 돌아다녔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북쪽의
파미르 고원을 넘어 727년경 당나라의 안서 도호부가 있는 쿠차를 거쳐, 733년 당안에 도착
하였다.
그후 그 곳의 천복사에서, 그 곳에 와 있던 금강지와 함께 밀교(불교의 한 교파)의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이듬해에 금강지의 죽음으로 이 일은 중단되었으나, 금
강지의
가르침을 이은 불공삼장의 6대 제자의 한 사람으로 당나라에서 이름을 떨쳤다. 그 후 오대산
건원 보리사에 들어가 그 곳에서 죽었다. 그의 인도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프랑
스의
학자 펠리오가 중국 간쑤성 둔황의 석굴에서 발견함으로써 1200년 만에 햇빛을 본 귀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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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846(?~문성왕 8)


신라시대의 장군. 일명 궁복.궁파. 일찌기 당나라 서주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이 되었으나,
신라에서 잡혀간 노비의 비참한 생활에 분개하여 사퇴하고 귀국하였다.
해적들의 인신 매매를 뿌리뽑기 위해 왕의 허락을 얻어 1만 명의 군사로
바닷길의 요충지인 청해(지금의 완도)에 진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가 되어 군사를
훈련하고, 해적을 소탕하였다. 837(화강왕 2) 왕위 계승 다툼에서 밀려난 우징이
청해진에 오자, 이듬해 그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민애왕을 죽이고 우왕을 왕위에 오르게
한 뒤 감의군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후, 시기하는 신하들이 보낸 자객 염장에게 죽음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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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 ?~719(?~천통21)


발해의 시조. 왕호 고왕(재위 699~719). 668년(고구려 보장왕 27) 고구려가 망하자
고구려 유민으로 라오허강 서쪽으로 이주하였다. 당나라의 억압에 대항하여 천문령에서
당나라 군사를 크게 무찌르고 말갈족을 합하여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 699년
둥마오산(지금의 지린성 근방)에 성을 쌓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진', 연호를 '천통'이라
정하고 왕이 되었다. 713년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회복하고 국호를 발해라 고쳤다.
그 때 발해의 영토는 5천 리(동은 동해, 서는 거란, 남은 신라)에 이르고 10만여호의
집과 수만 군대를 거느린 대국을 이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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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姜邯贊 948~1031 (정종 3~ 현종 22)


고려 시대의 명장. 시호 인헌, 본관 금천. 지금의 서울 봉천동에서 부유한 공신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키가 작고 얼굴도 못생겼으나 침착하고 의지가 강하였다. 983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예부 시랑이 되었다. 1010년 (현종1)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에 침입했다. 이 때 강조가 나가 싸우다 지자, 신하들은 왕에게 항복하기를 권했으나,
끝내 이에 반대하고, 하 공진을 적에게 보내어 설득시켜 물러가게 하였다. 그가 서경
유수에 임명되었을 때, 거란은 다시 고려를 괴롭히기 시작하여, 거란이 고려의 강동 6주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을 거절하자, 1018(현종 9) 거란은 다시 10만의 군사로 쳐들어왔다.
이 때 70세였던 그는 20만 군사를 이끌고 흥화진으로 진군하여 거란군과 싸웠다.
여기서 그의 군사들은 큰 밧줄에 쇠가죽을 꿰어 삽교천(의주 동쪽의 큰 냇물)
상류의 물을 마고, 부근의 산속에 숨어있다가 적군이 나타나자 갑자기 막았던 강물을
터놓아 적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적장 소배압은 나머지 군사들을 이끌고 황해도까지
밀고 내려왔으므로 이들과 싸움을 벌여 물러나게 하였다. 도망치는 적군을 공격하여
귀주에서 완전히 쳐부수었는데, 이것을 귀주 대첩이라고 한다. 그 후 거란은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하였다. 저서로는 '낙도 교거집','구선집' 등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84세로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 크게 장사를 지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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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 942~998(태조 25~목종 1)


고려의 외교가.문신. 자 염윤. 시호 장위. 본관 이천. 문과에 급제, 광평 원외랑에 이어
내의시장이 되었다. 982년(성종 1)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993년(성종 12) 거란이
쳐들어오자 중군사가 되어 참전하였다. 우리 쪽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평양 이북의 땅을
주고, 황주에서 자비령에 이르는 선을 국경으로 거란과 화해를 맺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 때 이를 강력히 반대하고 스스로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다. 소손녕은, 고구려의
옛 땅은 거란의 것이라며 강동 6주를 요구 하였다. 이에 그는, '고려는 고구려를
이어받았으므로 고구려 옛 땅은 고려의 것이다.'라고 맞서 그들의 말문을 막았다.
이것이 이른바 '서희의 외교 담판'이다. 994년 평장사로서 청천강 이북에 살고 있던
여진족을 몰아내고, 곽주.귀주 등에 강동 6주를 설치하여 압록강까지 나아가기 위한
발판을 삼았다. 995년에는 안주와 의주에 성을 쌓고 이듬해에는 선천과 맹산에 성을
쌓음으로써 평안 북도 일대의 땅을 완전히 확보하였다. 그 뒤, 내사령을 지내고,
개국사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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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부 1106~1179 (예종1~명종 9)


고려 시대의 무신. 본관 해주. 인종 때 견룡대정이라는 군인 벼슬에 올랐는데,
그 때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에게 모욕을 받고는 문신들에게 원한을 품었다. 의종 때
상장군이 되었으나, 의종은 무신들을 천대하였으므로 무신들 사이에 불만이 일고
있었다. 1170년 왕이 보현원으로 가던 도중 노장 이소응이 문신 한뇌에게 뺨을 맞은
사건이 일어나자, 그것을 계기로 정중부.이의방이 지휘를 받은 무신들이 그 자리에 있던
문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이것을 무신의 난 또는 정중부의 난이라 한다. 그는
곧 의종을 몰아내고 왕의 동생인 익양군(뒤의 명종)을 왕위에 앉힌 다음 무신 정치를
시작하여, 스스로 참지정사가 되고 벽상 공신에 올랐다. 1173년 김보당이 의종을
복위시키려고 반란을 일으키자, 난을 진압하고 의종을 죽였다. 이듬해 서경 유수
조위총이 난을 일으켰을 대 이것을 진압하고 문하시중이 되었는데, 뒤에 같은 무신인
경대승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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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 ?~1395(?~태조 4)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발명가. 본관 영주. 왜구를 무찌르려면 화약을 만드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중국 상인을 만날 때마다 화약 제조법을 물었다. 1376년(우왕 2)
원나라의 이원한테서 화약 제조법을 배워, 이듬해 화통도감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화약
외에 화통.신포 등의 제조는 물론 전함을 만드는 데에도 힘썼다. 1380년(폐왕 우 6)
왜구가 침입하자, 부원수가 되어 진포(지금의 금강 하구)로 나아가 처음으로 화통.화포
등을 사용하여 왜구의 선박 5백여 척을 전멸시키고 그 공으로 영성군이 되었다. 1383년
관음포에 침입한 왜구를 화약과 대포로 모두 무찔렀다. 1389년 '화약 수련법', '화포법'을
저술하고, 1392년 조선 개국 때는 정헌 대부.판군기시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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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 1075~1151(문종 29~의종 5)


고려의 문신. 학자. 자 입지, 호 뇌천, 시호 문열. 본관 경주. 국자감시의 시관을 지낸
아버지와 4형제가 모두 예부시에 합격한 권세있는 집안에서 자라나,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안서 대도호부의 사록. 참군사를 거쳐 우사간. 중서사인.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등을 지냈다. 학식이 높아서 왕에게 '주역','상서' 등을 강의하면서
정치의 바른 도리를 역설하였다. 1122년 (예종 17) 인종이 즉위한 후, 외척 이 자겸의
횡포가 심해지자, 그 잘못을 충고하기도 하였다. 또, '예종 실록'을 편찬하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곧은 성격 때문에 반감을 품는 자도 많았다.1134년(인종 12) 묘청이
도참설(미래의 길흉을 예언한 책의 주장)을 이용하여 서울을 서경(평양)으로 옮기려
할 때 강력히 반대하여 중지시켰다.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총사령관이 되어,
묘청과 내통한 정지상.백수한과 김안등을 제거하고 10개월 만에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 공으로 정국 공신이 되었다. 1145년(인종23) '삼국사기' 50권을 편찬하였는데, 이것은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우리 나라의 역사책이다. 그 후 '인종 실록'의 편찬을
지도하였다. 죽은 후 중서령으로 관위를 높여 주었다. 문집 20여권이 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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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 1158~1210(의종 12~희종 6)


고려 시대의 승려. 본성은 정, 호 목우자, 시호 불일보조. 부모의 뜻에 따라 8세 때 중이
되었다. 1182년 승과에 급제했으나, 수도에만 힘쓰기로 하였다. 창평 청원사에 들어가
'단경'을 읽고, 중생을 제도하려면 먼저 자신이 부처의 경지에 이르러야 함을 깨달았다.
지리산 상무주암에 들어가 3년간 참선하여 선의 참뜻을 깨쳤다. 송광산 길상사로 가서,
중생을 떠나 따로 뿌처가 있음이 아니라, 중생을 위하여 일하는 데에 부처가 있다고
가르쳤다. 선종(참선을 중시한 불교의 한 파)과 교종(불교의 교리를 중시한 불교의 한 파)을
하나로 합치려고 노력하여 선종 우선의 조계종을 세웠다. 죽은 뒤 국사의 관위가
주어졌다. 저서로 '수심결','진심직설','간화결의론','법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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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 1055~1101(문종9~숙중6)


고려 시대의 승려, 천태종의 시조. 이름 후, 의천은자, 시호 대각. 문종의 네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예 왕후. 11세 때 승려가 되어 통영사에서 왕사 난원한테 화엄의 교리를 배웠다.
13세 때 승통에 임명되고, 문조으로부터 우세라는 호를 받았다. 1084년(선종 1) 몰래
송나라로 건너가 계성사에 머무르면서 유성 법사에게서 화엄종과 천태종의 깊은 뜻을
배웠다. 그 후 상국사.흥국사 등을 거쳐 이듬해에는 항저우로 가 정원 법사에게서
'화엄소초'에 대한 의문점을 지도 받고, 자변 대사로부터는 천태종의 교리를 들었다.
'해동 석가'라 불리며, 그가 오래 머물렀던 혜인선사는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고려사로
개명하였다 한다. 1086년 어머니와 형(선종)의 간청으로 귀국하여, 아버지(문종)가 세운
흥왕사 주지가 되었으며, 절 안에 교장도감을 두고 외국에서 가져온 불경 등을 번역하는
한편, 옛 책을 모아서 '속대장경'을 완성하였다. 1095년(현종 1)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화폐 사용을 주청하고, 1097년 어머니가 지은 국청사 주지가 되어 천태종을 강의하였다.
고려 불교가 신라의 법계를 이어받아 교종과 선종으로 갈라져 있던 당시, 천태종을 개설하고
원효의 1불승의 이치에 따라 고려 불교를 융합하였다. 유교에도 밝았으며, 죽기 2일전에
국사로 임명되었다. 저서로 '십진원종문류'.'해동유본 견행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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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1360~1425(공민왕 9~세종 7)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의 무신. 시호 앵후. 본관 장수. 1381년 아버지와 함께 강원도에서
왜구를 물리친 공으로 정용호군이 되었다. 1397년(태조 6) 옹진 만호로 있을 때 왜구가
다시 쳐들어와 성을 포위하자, 이를 격퇴하여 첨절제사에 올랐다. 1400년(정종 2)
상장군으로 있을 때 2가 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좌명 공신 4등으로 통원군에
봉해졌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서 1419년(세종 1) 삼군 도체 찰사가 되어, 전함
227척을 거느리고 쓰시마섬을 정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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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1337~1392 (고려 충숙왕 복위 6~ 조선 태조 1)


고려 말기의 문신. 학자. 처음 이름 몽란. 몽룡., 자 달가, 호 포은, 시호 문충, 본관 연일.
1357년 국자감 시험, 1360년 문과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듬해 예문관 검열을 지내고,
1364년(공민왕 13) 이성계의 종사관으로 여진족을 무찌르는 데 공을 세웠다. 1372년
서장관으로 홍사범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오고, 1374년 성균관 대사성에 올라 원나라와
외교 단절을 주장하다가 언양으로 귀양갔다. 1376년 풀려나서, 이듬해 일본 규슈에 건너가,
왜구의 침략을 엄중 항의하고, 잡혀 있던 고려인 수백 명을 데리고 왔다. 1380년(폐왕 우 6)
조전 원수로 이성계와 함께 황산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그 해에 밀직제학에 올랐다. 한편,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우게 하여 교육 발전을 꾀하였으며, '대명률'을 본떠
'신율'을 간행, 법질서를 바로잡기에 힘썼다.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려는 것에 반대하여
유명한 '단심가'를 지어서 고려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였다.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기회를 엿보던 중 1392년 선죽교에서 이 방원의 부하 조영규에게
피살되었다. 유학을 깊이 여가구하여 길재. 이색과 더불어 고려의 3은으로 불리낟.
저서로 '포은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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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 1329~1398(충숙왕 16~태조 7)


고려 말기의 학자.문신. 자 일신, 호 삼우당, 시호 충선. 본관 남평. 우리 나라에
목화씨를 퍼뜨린 사람. 경상도 강성 고을에서 선비인 문 숙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나 1339년(충숙왕 복위 8) 11세 때 이름난 학자인 이곡의
제자가 되었다. 16세에 결혼하고 1348(충목왕 4)에 개경에 올라가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다. 1360년(공민왕 9) 32세 때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1363년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을 때 원나라가 공민왕을 내치고 덕흥군을 왕으로 삼으려 하자,
그에 반대하다가 중국 남방으로 귀양갔다. 1364년 귀양살이에서 풀려날 때 목화씨를 붓대
속에 숨겨가지고 와서 재배에 성공, 10년이 지난 뒤에는 전국에서 목화 재배가 이루어졌다.
그는 또 후손에게 실 뽑는 물레와 무명짜는 법을 연구하게 하여 우리 나라 의복 생활에
큰 공을 세웠다. 1392년(조선 태조 1) 이성계가 몇 차례나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힘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1440년(세종 22) 영의정의 관위가 내리고, 강성군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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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 984~1068(성종 3~문종 22)


고려 초기의 문신.해자. 자 호연. 호 성재, 시호 문헌. 본관 해주.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1013년 국사 수찬관이 되고, 태조에서 목종까지의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037년(정종 3) '현종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047년(문종 1) 문하시중이 되어
법판들에게 율령을 가르치고 형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관리 임명에는 실력을
중히여겼으며, 직무에 성실을 다하여 공신의 호를 받았다. 72세 때 벼슬에서 물러나,
사립 학교와 같은 사숙을 열고 학자들을 기르며 여생을 보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해동 공자'라고 일컬어졌는데, 그의 제자들을 문헌공도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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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 1206~1289(희종2~충렬왕 15)


고려 시대의 승려. 학자. 속성 김, 이름 견명, 처음자는 회연, 일연은 자중의 자, 호 무극.목암,
시호 보각. 경상 북도 경산 출생. 1214년(고종 1) 9세에 해양(전라남도 광주) 무량사에서
도를 닦고, 1219년 14세 때 승려가 되어 전국의 이름날 절을 찾아다니며 공부하여 20세에
선불장에(승려의 과거 시험)에 장원 급제하여싸. 1237년(고종 94)년 선사, 1259년 대선사가
되었다. 한편 몽고의 횡포가 극심하던 당시, 백성들에게 불법을 펴서 민심을
가라앉히기에 힘썼다. 또, 대구 팔공산 부인사의 '대장경'이 불타자, 현종의 명을 받아
새로 발간 하였다. 일생을 통하여 100여 권의 책을 지었는데, 그 중에서도 '삼국유사'가
특히 유명하다. 이 책은 '삼국유사'가 특히 유명하다. 이 책은 '삼국사기'와 함께
우리 나라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 외에 '어록','계승잡저',
'중편조동오위'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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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1316~1388 (충숙왕 3~창왕 즉위)


고려 말기의 무신. 시호 무민. 본관 창원.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아버지가
죽으면서,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한 유언에 따라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다. 왕의
호위병으로 뽑힌 뒤 39세 때 대장군이 되어 1358년(공민왕 7) 오예포에 침입한 왜선
4백여 척을 무찔렀다. 이듬해 평양에 침입한 홍건적 4만여 명을 물리치고, 1361년 안우와
함께 개성을 점령한 홍건적을 물리쳐 1등 공신이 되었다. 1388년(폐왕 우 14)
수문하시중이 되었을 때,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소유하겠다고 통고해 오자, 랴오둥
정벌을 나섰다. 그러나, 이 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 후
이성계에게 잡혀 누명을 쓰고 고향으로 귀양갔다가, 그 해 12월에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죽음과 함께 고려 왕조의 운명도 기울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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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1363~1452 (공민왕 12~문종 2)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처음 이름 수로, 자 구부, 호 방촌, 시호 익성. 본관 장수.
개성 출생.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관이 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서 숨어
살았으나, 이 성계의 간청으로 조선의 벼슬에 올랐다. 사헌 감찰, 경기도 도사, 이조 정랑
등을 거쳐 1416년 (태종 16) 이조 판서가 되었다. 1418년 충녕 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다가 귀양갔으나, 1422년(세종 4) 풀려나와 좌참찬이 되었다.
그 후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431년(세종 13) 영의정이 되어 18년 동안이나 재상으로
있으면서, 농사개량.예법 등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세종이 가장 신임하는 재상으로
명망이 높았고,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만인의 존경을 받았으며, 숱한 일화를 남겼다.
시와 문장에도 뛰어나 문집인 '방촌집'을 남겼다. 경기도 파주의 방촌 영당, 경북 상주의 옥동
서원 등에서 제사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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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사성 1360~1438(공민왕 9~세종 20)


고려말.조선초기의 문신. 자 자명, 호 고불.동포, 시호 문정. 본관 신창. 충남 온양 출신.
문과에 급제, 예문 춘추관 검열을 거쳐 조선 시대에는 수원 판관 등을 지내고 명나라에
다녀와 한성 부윤이 되었다. 1408년 대사헌에 올랐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한주로 귀양간
일도 있었다. 귀양에서 풀려나 예조 참판을 거쳐 1416년부터 호조.공조.이조 판서를 지내고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다. 1425년 명나라에 다녀와서 문신으로는 최초로 삼군
도진문(삼군을 다스리는 으뜸 벼슬)가 되고, 1427년 우의정이 되었다. 1429년 '태종실록'을
감수하고 1431년에는 좌의정이 되었다. 그 후 '팔도 지리지'를 였었는데, 황 희와 함께 조선
초기의 문화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늘 검소한 생활을 했는데, 어느 수령이 남루한 옷차림을
한 맹사성을 몰라보고 야유를 하였다가 뒤늦게 그가 맹사성임을 알고 도망치다가 관인을
못에 빠뜨렸는데, 그 못을 '임침연(도장이 잠긴 연못)'이라 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시와 글
음률에 능하였다. 후에 검소한 관리, 효자로 표창 받아 정문이 세워졌다. 작품에 '강호사시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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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 ?~?


조선 시대의 과학자. 본관 아산. 원래 부산 동래에서 종살이를 하였는데, 매사를 자세히
관찰하고, 그 원리를 캐내는 데 열심이었다. 그리하여, 광석을 제련하거나, 무기를 만들고
고치는 일, 성을 쌓는 일, 농기구를 개량하는 일 등에 뛰어난 솜씨를 보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숨은 인재를 찾던 세종은 장영실의 소문을 듣고, 1423년(세종 5) 그를 불러 상의원
별좌에 임명하고, 종의 신분에서 풀어주었다. 1432년 중추원사 이천을 도와 천문 관측에
필요한 간의대를 만드는 사업을 벌였다. 그리하여, 1437년
대간의.소간의.현주일귀.정남일귀(해시계) 등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세종은 이 기구들을
경복궁 안의 간의대에 보관시켰다. 1434년(세종 16) 자격루를 완성하고, 4년 후 흠경각의
자동 물시계인 옥루기륜을 만들었으며, 세종 23년에는 세계 최초로 측우기와 수표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아는 등 과학 발전에 공이 컸다. '발명의 날'은 장열실의
측우기 발명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세종은 그의 공을 기리어 상호군의 벼슬을
내렸으나, 1442년 그가 감독 제작한 왕의 가마가 부서진 책임을 지고 벼슬에서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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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 1417~1475(태종 17~성종 6)


조선 초기의 학자.문신. 자 범옹, 호 보한재.희현당, 시호 문충. 본관 고령. 1439년 문과에
급제하고 1443년(세종 25)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가서 시로써 이름을 떨쳤다. 귀로에
쓰시마섬에 들러 계해조약을 맺었다. 그 뒤, 랴오둥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 학자 황찬에게
음운에 관해 묻고, 성 삼문과 함께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 힘썼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좌익공신 1등이 되고 예문관 대제학에 올랐다.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자, 단종과 금성 대군을 죽이는 일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 공으로 좌의정이
되고 1460년(세종 6)에는 북방에 침입한 야만족을 정벌하여 영의정으로 올랐다. 뛰어난
문학적 재능과 학식으로 6대의 왕을 모시며, '국조오례의'.'동국정운','국조보감'.'세조 실록'
등을 편찬하는 데 참가하였다. 문화 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나,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는 일에 협력한 탓으로 비난 받았다. 저서로 '보한재집'.'북정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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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 1415~1487 (태종 5~성종 18)


조선 초기의 문신. 자 자준, 호 압구정, 시호 충성. 본관 청주. 장순 왕후(예종비)와 공혜
왕후(성종비)의 아버지. 1452년 친구 권남의 주선으로 수양대군의 참모가 되어, 홍달손 등
무사 30여명을 수양 대군에게 추천하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수양 대군을 도와
반대파인 김종서.황보인등을 죽이고 정난공신 1등으로서 사복시 소윤이 되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우승지가 되고, 이듬해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좌절시키고는
좌송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이어 이조 판서.병조 판서.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466년(세조
12) 영의정이 되었다. 14657년 이시애의 난 때, 반역자들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한때 옥에
갇혔으나 혐의가 없어 풀려났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원상(왕이 죽었을 때 정치를 대행하는
벼슬)이 되었고, 1469년(예종 1)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며, 이 해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병조 판서를 겸하였다. 죽은 후 세조의 사당에 위패가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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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1536~1584(중종31~ 선조 17)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어렸을 때의 이름 현룡,자 숙헌, 호 율곡.석담.우재 등, 시호 문성.
본고나 덕수.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 강릉의 외갓집에서 태어났는데, 그 집이 바로
오죽헌이다. 훌륭한 어머니 신 사임당에게서 교육을 받고, 13세 때 진사시에 장원하였다.
16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불교를 연구하다가 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 21세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23세 때에는 이 황을 찾아가 학문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는데, 이 황은 그의
총명함과 인품에 감탄했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차례 과거에 잡원 급제하여, 9도 장원공이라
일컬어졌다. 여러 벼슬을 거치고 대사간을 9번이나 맡아, 왕이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도왔다.
그리하여, 왕으로서 취해야 할 태도를 밝힌 '동호문답','만언봉사','성학집요'등의 책을 펴냈다.
10만 양병론을 주장하였으나, 다른 신하들의 반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9년 후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34세 때 병이 나자 황해도 해주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학문과 수양에 열중하였다. 그 때 그곳의 경치를 읊은 시조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그 해에 청주 목사가 되어 향약을 만들었고, 그뒤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도 향약 운동을
크게 일으켰다. 선조 때에는 당파 싸움을 화해시키려고 애쓰다가 병사하였다. 기호 학파의
시조로, 이 황의 영남 학파와 더불어 조선 시대 유학의 쌍벽을 이루었다.
'격몽요결','소학집주개본','중용토석','경연일기' 등의 저서가 있으며, 뒤에 '율곡 전서'가
간행되었다. 선조의 묘정에 모셔졌으며, 강릉의 송담 담원 등에서 제사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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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1501~1570(연산군 7~선조3)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처음 이름 서홍, 자 경호, 호 퇴계.도옹.퇴도.청량산인, 시호 문순.
본관 진보. 경상도 예안 출생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12세 때 숙부
이우에게서 '논어'를 배웠다. 1534년 문과에 급제, 수찬.정언 등을 거쳐 형조 좌랑이 되고,
승문원 부교리를 겸했다. 충청도 암행 어사로 나갔다 와서 1543년 대사성에 올랐다. 1548년
단양.풍기 군수를 지낸 뒤 48세 때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돌아와 도산에 서원을 짓고,
'주자서절요'를 펴냈다. 1558년 57세 때에는 주자의 '역학계몽'을 연구한 끝에 '계몽전의'를
지었으며, 1560년에는 '송계원명이학통론'을 내놓았다. 시에도 뛰어나 '도산 십이곡'을 남겼다.
59세 때 다시 대사성.부제학 등에 올라, 나쁜 관리를 내쳤다. 유학의 근본 원리와 실천
방법을 적은 '성학십도'를 지어 왕에게 올리고,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가 학문과
제자 양성에 힘썼다. 주자의 이기 이원론을 발전시켰고, 이기호발설 사상을 자기의
중심사상으로 삼았으며, 4단 7정의 문제를 놓고 기대승과 8년에 걸친 논쟁을 벌인 일은
유명하다. 그의 학풍은 유성룡.김성일.정구 등에게 이어져 영남 학파를 이루었으며, 이이 등의
기호 학파와 대립되었다. 그의 학설은 일본.중국에서도 높이 평가하였다. 현실 생활과 학문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하였다. 죽은 뒤에 영의정으로 관위를 높여주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신주를 모셨고 예안의 도산 서원 등에서 제사지내고 있다. 저작에
'퇴계전서',' 글씨에 '퇴계필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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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1504~1551 (연산군 10~명종 6)


조선중기의 여류 문학가.화가.서예가.호 사임당. 본관 평산. 강원도 강릉에서 교양 높은
부모의 딸로 태어났다. 바르질이나 수예는 물론, 글과 글씨.그림 등에 이르기까지 천재적
재능을 보여 부모.친지의 깊은 사랑을 받았다. 7세 때 이미 안견의 산수화를 본떠서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그림에서는 산수화뿐만 아니라 포도.풀.벌레 등에도 솜씨가 뛰어났다.
유교의 경전과 좋은 책들을 널리 읽어 학문을 닦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예술가인 동시에
높은 덕과 인격을 쌓은 어진 부인으로, 또 훌륭한 어머니로 여성의 모범이 되었다. 19세 때
이원수와 결혼하여 4남 3녀를 두었는데, 세째 아들이 바로 율곡 이이다. 항상 몸가짐을
조심하여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남편에게는 항상 올바른 길을 가도록 내조하였으며, 7남매를
모두 훌륭하게 키웠다. 그러면서도 시부모와 친정어머니를 잘 모셔 효녀로서도 알려졌다.
작품으로 시에 '유대관령망친정'.'사친' 등이 있고, 그림에
'자리도'.'산수도'.'초충도'.'노안도'.'연로도' 등이 있으며, 이이가 태어난 강릉의 오죽헌에는
글씨가 남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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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 1552~1617 (명종 7~광해군 9)


조선 시대의 의병장. 자 계수, 호 망우당, 시호 충익. 본관 현풍. 경상 남도 의령에서
태어났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왕의 뜻에 거슬리는 글귀 때문에 벼슬에 오르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의주로 피난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선두에서 왜적을 무찔러서, 사람들은 그를 홍의 장군이라 불렀다. 그러나, 왜적을 피하여
달아났던 감찰사 김수와의 불화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다가 초유사 김성일의 도움으로
풀려나 유곡도찰방.조방장.성주 목사 등을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경상 좌도 방어사로서
화왕산성을 수비하였고, 경상 우도 조방장이 되어 영창 대군을 구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어머니가 죽었을 때에는 3년 동안 어머니의 무덤을 돌보며 효성을
다하였다. 그 후 부총관.한성부 좌윤.함경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당쟁으로 통제사 이순신이
죄없이 잡혀 올라오고, 광주 의병장 김 덕령이 이몽학의 난에 휘말려 죽는 등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창암에 망우정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시와 글씨에도
능하였으며, 저서로 '망우당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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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 1544~1592(중종 39~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의병장. 자 여식, 호중봉, 시호 문렬. 본관 배천. 문과에 급제, 정주 교수가
되고 그 후 호조.예조 좌랑, 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옥천에서
의병 1700여 명을 모아 영규 등의 승병들과 합력하여 왜적에게 빼앗긴 청주를 되찾았다.
이어 전라도로 진격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으로 향했으나, 그를 시기하는 정부군의
방해로 의병은 대부분 흩어지고, 불과 700여 명만 남았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그들을
이끌고 금산 싸움에 참가하여, 7백 의병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후에 그가 전사한 곳에
그의 충성을 찬양하는 비가 세워지고, 칠백 의총이 마련되었으며, 여으이정 관위가 내려싼.
이이의 학문을 더욱 발전 시켰고, 저서로 '중봉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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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민 1554~1592(명종 9~선조 25)


조선 중기의 무신. 자 면오, 시호 충무. 본관 안동. 1578년(선조11)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
판관으로 있을 때, 군사에 관한 일을 병조 판서에게 건의하였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싼. 1591년(선조24)진주 판관으로 기용되었으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죽은 목사를 대신하여 성을 수리하고 무기를 갖추었는데, 그 공로로 목사가 되었다.
사천.고성.진해 등지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경상 우도 병마 절도사에 올라 금산에서 다시 적을
격파하였다. 그 해 10월 왜적의 대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3800명의 군사로 7일 동안 성을
굳게 지키며 싸워 왜적 3만여 명의 사상자를 냄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다.(진주대첩) 이를
싸움에서 그는 용전 끝에 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1604년 선무 공신에 봉해지고 후에
영의정.상락부원군으로 관위를 높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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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1545~1598(인종1~선조31)


조선 중기의 명장. 자 여해, 시호 충무, 본관 덕수. 서울에서 태어나 1576년(선조 9) 무과에
급제, 함경도 동구비보권관이 되었다. 이어서 훈련원 봉사, 발포 수군 만호 등을 거쳐 1591년
유성룡 등의 천거로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에 올라, 왜적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비를
갖추기에 힘썼다. 이듬해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1차로 옥포 앞바다에서 적선
30여 척을 무찌르고, 이어서 제 2차로 사천에서 스스로 만든 거북선을 이용하여 적선 13척을
불태웠으며, 당항포에서 100여 척을 각각 쳐부수거나 불태우는 등 승리를 거두고, 자헌대부에
올랐다. 그 해 7월 제3차로 한산도에서 적선 70여척을 무찔러 역사상 유명한 한산 대첩의 큰
공을 세웠다. 이어서 정헌대부에 알랐고, 다시 안골포에서 42척의 적선을 침몰시켰다.
9월에는 적의 본거지였던 부산에 쳐들어가 적선 100여 척을 쳐부수었고,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테서 적의 수군을 크게 무찔러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겼으며, 최초로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었다. 그 뒤 명나라의 원군이 들어오자
죽도로 진을 옮겨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적을 막았다. 그리고 전쟁이 좀 쉬는 듯 하자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 확충에 힘썼다. 1597년 반대파 간신들의 모함을 받고 서울에 압송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정탁의 변호로 면하고 권율의 부하 장군이 되었다. 같은 해 정유재란
때, 삼도수군 통제사가 되어 있던 원균이 참패하자,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되어, 남은
배 12척으로 133척의 적선과 대결하여 31척을 쳐부수었다. 1598년 11월 9일, 고금도로 진을
옮기고 도망가는 적선을 노량 앞바다에서 무찌르던 중 왼쪽 가슴에 유탄을 맞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글에도 뛰어나 '난중 일기' 등의 저서와 여러편의 시조.한시 등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한산섬 달 밝은 밤에....'란 시조는, 그의 애국심을 잘 나타낸 것으로 유명하다.
투철했던 애국 정신과 뛰어난 전술로 나라를 지켜 준 그는, 죽은 뒤 영의정으로 관위가
높여지고,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사적 제 112호인 아산 현충사
등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제사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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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


조선 왕조 세조 때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잡혀 죽은 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성삼문.박팽년
의 여섯 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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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육신


조선 왕조 때 단종을 몰아낸 세조의 그릇된 처사에 분격, 벼슬을 하지 않은 여섯
사람(이맹전.조여.원호.김시습.성담수.남효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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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1593(?~선조 26)


임진왜란 때의 의기. 성 주. 전라 북도 장수에서 출생. 진주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사랑을
받았다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을 빼앗기고 진주성만 남았을 때,
우리의 군사들과 민간인들은 6만의 왜병을 맞아 용감하게 싸웠으나, 결국 성이 함락 되었다.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주연을 벌였을 때 기생으로서 이 자리에 불려나온 논개는, 울분을
감추고 왜장들을 접대하였다. 일본 장수 게야무라가 논개에게 춤을 청하자 이에 응하여 절벽
위의 바위로 꾀어서 그의 목을 끌어안고 남강에 떨어져 왜장과 함께 목숨을 버리었다. 후에
그 바위를 '의암'이라하고, 사당을 지어 논개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한 논개의 순절을
기리어, 그녀의 고향인 장수에는 정문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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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 1537~1599(중종32~선조32)


조선 중기의 장군. 자 언신, 호 만취당.모악. 시호 충장. 본관 안동. 영의정 권 철의 아들.
벼슬에 마음을 두지 않아 1582년 46세에야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라싼. 승문원 정자.예조
정랑.경성 판관 등을 거쳐, 1591년(선조24) 의주 목사가 되었다가, 다음 해 광주 목사가
되었다. 그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순찰사 이광과 방어사 곽영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으로 용인에서 왜군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뒤 남원에 머물면서, 1000여가 명의
의용군을 모집하여, 금산군 이치 고개에서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부대를 크게
무찔렀으며, 그 공으로 전라도 순찰사가 되었다. 또, 함락된 수도를 도로 빼앗기 위하여
북진하던 중, 수원의 독왕산성에 주둔하면서 튼튼한 진을 만들어 끈기 있게 일본군과 싸웠다.
이 때 우키타 히데이에가 이끄는 대부대의 공격을 물리쳤다. 1593년(선조26)에는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 거이에게 시흥 금주산에 진을 치게 하고, 자신은 2800명의 군사로
행주산성에 진을 쳤따. 그는 이 때 순사들에게 돌을 운반하기에 편리한 앞치마를 입게하였고,
3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해 온 고바야카와의 왜군을 맞아 2만 4천여 명을 살상하고 크게
이겼다. 이 싸움이 유명한 행주 대첩으로, 이 때 입은 앞치마를 행주치마라고 한다. 이
공으로 도원수가 되어 전육군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도망병을 즉결 처분한 죄로 물러났다가,
한성부 판윤으로 다시 뽑히고 비변사 당상을 겸하였다. 1596년(선조29) 충청도 순찰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원군들과 힘을 함쳐
왜군의 공격을 막았다. 임진 왜란 7년 동안 육군을 총지휘한 권 장군은, 바다의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역사에 빛나는 공을 세웠다. 1599년(선조 32)에 늙은 몸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가싼. 죽은 뒤 여으이정으로 관위를 높여주고, 1604년(선조 37) 선무 공신
1등에 영가 부원군으로 봉해졌다. 행주산성의 옛터에 행주 대첩비가 세워졌으며, 기공사에서
제사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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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1562(?~명종 17)


조선 중기의 의로운 도적. 임거정이라고도한다. 원래는 양주의 백정이었으나, 정치의 혼란과
관리들의 부패로 민심이 혼란해지자, 1559년(명종 14) 불평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창고를 헐고 곡식을 꺼내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관청을
습격하여 관리들을 죽였다. 장연.풍천 등지에서는 정부군의 토벌을 당하였으나, 백성들의
협조로 무사하였다. 한때는 개성에 쳐들어가 포도관 이억근을 죽이기도 하였으나, 형
가도치와 참모 서임이 잡혀 세력이 약해지고, 1562년 남치근의 대토벌 작전에 맞서
구월산에서 싸우다가 잡혀 사형당하였다. 그에 관한 많은 이야기와 역사 소설이 있으며,
'명조 실록'에서는 그의 이름이 임 거질정으로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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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 1691~1756(숙종 17~영조 32)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성보, 호 기은, 시호 충헌. 본관 고령. 1723년(경종3)문과에 급제하고
1727년 영남 암행 어사가 되어 부정한 관리들을 찾아 냈다.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출전하여
공을 세웠으며, 1730년 호서 어사가 되어 굶주리는 백성들의 구제에 힘썼고, 1734년(영조
10)과 1738년 두 차례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741년 함경도 진휼사로서 경상도에서
곡식 1만섬을 실어다가 흉년으로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여, 후에 함흥 만세교 옆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1749년 호조판서가 되어 균역법을 만드는 데 힘을 기울였다. 왕세손의
사부가 되었으나 1752년 세손이 죽자 책임을 추궁당하고 제주도에 귀양갔다가 다음 해에
풀려났다. 특히 군사와 세금에 관하여 밝았고, 여러 번의 암행 어사가 되어 많은 일화를
남겼다. 저서에 '탁지정레','국혼정례', 글씨에 '오명항토적송공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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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봉(한호) 1543~1605(중종38~선조38)


조선 중기의 서예가. 자 경홍, 호 석봉.청사. 본관 삼화. 개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명필인 왕희지와 안진경의 필법을 열심히 익혀 해서.행서.초서 등 여러 체의 글씨에 모두
뛰어났다. 1567년(명종22)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599년 '사어'라는 벼슬을 시초로, 가평
군수.흡곡 현령.존숭도감 서사관 등을 지냇다. 그 동안 명나라에 가는 사신을 따라갔을 때나
명나라의 사신을 맞을 때, 명나라의 명필들과 만나 그의 절묘한 글씨로 대륙에까지 명성을
떨쳤다. 그의 글시로는 '석봉 서법'.'석봉 천자문' 등이 있는데, 친필은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비석에 새긴 글씨는 많이 남아 있어, 용인의 '허엽 신도비', 개성의 '서경덕
신도비'와 '선죽교비',평양의 '기자 묘비', 행주의 '행주 승전비' 등이 있다. 조선 후기의
김정희와 함께 조선 시대 서예의 대표자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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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김홍도) 1745~?(영조21~?)



조선 말기의 화가. 자 사능, 호 단원.단구.서호.고면거사.첩취옹. 본관 김해. 안견.장승업과
함께 조선 시대 3대 화가의 한 사람이며,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풍속화가이다. 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뛰어난 그림 솜씨가 조정에 알려져 영조 말에 도화에서 화원이 되었고, 곧
왕실의 전속 화가가 되어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1781년(정조 5)에는
정조의 초상화가로서 우대를 받았고, 1788년 왕명으로 금강산의 풍경을 그려 바쳤다. 또,
왕명에 따라 쓰시마 섬에 건너가 섬의 지도를 그려 왕에게 바쳤다. 1789년 수원에 용주사가
세워지자 대웅전에 벽화를 그렸고, 1796년에는 용주사 '부모은중경'의 삽화를 그렸다. 당시
화풍은 중국의 북화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으나, 그는 자기 나름대로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여,
그의 풍속화는 익살과 풍자를 담은 서민적인 풍취를 나타내고 있다. 작품에
'소림명월도'.'신선도병풍'.'쌍치도'.'무이귀도도'.'낭구도'.'궁선도'.'선동취적도'및
'풍속화첩'.'청앵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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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1864(?~고종1)


조선 말기의 지리학자. 자 백원, 호 고산자. 본관 청도.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서울로 이사하여 열심히 공부하는 한편, 정확한 지도를 만들어 보겠다는 꿈을 키웠다. 그는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지도마저 정확하지 못함을 보고, 실제로 여러 지방을 다니며 지도를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전국을 30여 년간 두루 답사한 끝에 1834년(순조 34) '청구도' 2첩을
완성하였으나 만족하지 않고, 전국을 다시 답사하여 1861년(철종 12) '대동여지도'를 다시
간행하였고, 여러 지방의 연혁.풍속.인물.산수.거리 등을 상세히 기록하여 '대동지지' 15책을
간행하엿다. '대동여지도'는 손수 그리고 띵판을 새긴 것으로, 그 한 벌을 흥선 대원군에게
바쳤는데, 이것을 본 대원군은 나라의 기밀을 누설하였다는 죄명을 씌워 그를 옥에 가두고,
목각판 지도를 압수하여 태워버렸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감옥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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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694~1776(숙종20~영조52)


조선 제 21대 왕(재위 1724~1776). 숙종의 네째 아들. 이름 금, 자 광숙, 호 양성헌. 1699년
연잉군에 봉해졌다가 이복형 경종에게 아들이 없자 왕세자로 책봉되고, 1724년 왕위에
올랐다. 자신의 왕세제 책봉, 대리 청정 등을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의 당파 싸움이 심해지자
탕평책을 써서 두 당파의 단합을 꾀하였다. 조선의 역대 왕 중 가장 긴 52년을 왕위에 있는
동안 이인좌의 반란(1728), 사도세자 사건(1762) 등 어려움도 있었으나, 정치 개혁으로 선정을
베풀어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균역법을 만들어 세금 제도를 고치고, 가혹한 형벌을
금하였으며, 연산군 때 폐지되었던 신문고 제도를 다시 실시하여 백성들의 하소연을 들었고,
도량형을 통일하고 사치를 금하는 등 사회 안정에 힘섰다. 또, 농업을 장려하여 민생의
안정을 꾀하고 북방 군사들에게 조총 훈련을 시켜싼. 화차를 만들고, 수어청에 총을 만들도록
명령하였으며, 여러 성을 개축하는 등 국방에도 힘썼다. 학문을 좋아하여 인쇄술을 개량하고
책을 많이 찍어 내어 널리 폈다. 실학의 발전을 돕는 등 사회.산업.문화.예술 등 각 방면에
걸쳐 조선 중흥 시대를 이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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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1752~1800(영조 28~정조24)


조선의 제 22대 왕(재위 1777~1800). 이름 성, 자 형운, 호 홍재. 아버지는 장헌 세자,
어머니는 혜경궁 홍씨. 1759년(영조 35)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1762년 아버지 장헌 세자가
비참하게 죽은 뒤, 1775년부터 할아버지인 영조를 대신해서 정치를 보살피다가 이듬해
영조가 죽자 왕위에 올랐다. 영조의 뜻을 이어받아 당파 싸움을 조정하고 뿌리뽑기 위하여
애썼다. 즉, 탕평책을 써서 인재를 고루 뽑아 썼다. 규장각을 세워 역대의 서적을 보관하고
임진자.정유자.한구자.생생자 등의 활자를 새로 만들어 인쇄술의 발달을 꾀하고, 서적
편찬에도 힘써, '국조보감'.'문원보불'.'규장전운'.'오륜행실' 등으르 간행하였으며, 자신의 문집
'홍재전서'도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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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1762~1836(영조 38~헌종2)


조선 왕조 중기의 학자. 문신. 자 미용.송보, 초자 귀농, 호 다산, 시호 문도, 교명은 요한.
본관 나주. 1777년 이름난 학자 이가환과 매부 이승훈한테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특히
이익의 책을 읽으며 실학에 힘을 기울였다. 1783년 회시에 급제하고, 이듬해 정조에게
'중용'을 강의하였다. 1789년 식년 문과에 급제,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정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1794년 경기도 암행 어사가 되어 백성들의 생활 상태와 관리들의 잘못을 살피었다.
그 뒤, 규장각에서 서적 편찬의 일을 맡아 보며 '규장 전운'.'옥편' 등을 편찬하였다. 1800(정조
24)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는데, 그 해 순조가 왕위에 올라 천주교를 박해할 때, 잡혀가
경상도로 귀양갔다가 곧 전라도 강진으로 옮기었다.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 '다산
문답','경세유표' 등 많은 책을 썼다. 그중에서도 특히 1818년에 완성한 '목민심서' 48권과
1819년에 내놓은 '흠흠신서' 30권은 뛰어난 책이다. 1959년 다산 기념 사업회에서 마현의 묘
앞에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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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1854~1895(철종 5~고종 32)


조선 말기의 동학 혁명 지도자. 초명 명숙, 별호 녹두 장군. 전라 북도 태인 출생. 그의
아버지가 군수의 폭정에 대항하여 군청을 습격하였다가 잡혀 비참하게 죽는 것을 보자, 소년
전봉준은 부패한 관리들한테 시달리는 가난한 농민들을 잘살 수 있게 해야 겠다는 뜻을
품었다. 그러던 중 동학 사상에 마음이 끌려 1888년 동학에 들어갔다. 1892년 고부 군수로 온
조병갑이 농민들로부터 금전과 곡식을 강탈하자, 그는 농민 대표와 함께 군수에게 바른
정치를 해주도록 호소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1894년 1월 농민과 동학 교도들을 이끌고
군청을 습격하여 창고의 양곡을 풀어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부패한 관리를 잡아
가두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그들을 달래기 위해 이용태를 보내삳. 그러나, 이용태 역시
농민의 재산을 빼앗는 등 횡포가 심하자, 전봉준은 그해 3월 동학 교도를 중심으로 혁명군을
모아 부근의 고을부터 점령해 들어가싼.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나라의 군사가 오고 톈진
조약을 핑계로 일본군도 들어와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부패한 관리들의 처벌, 노예의 해방
등 12개 조목을 실천하기로 약속받고 일단 진정하였으나 이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청.일 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우리 나라에 침략의 손길을 뻗치자 그는 다시 군사를 일으켰다.
그해 9월, 12만 명의 군사를 지휘하여 북쪽 교구장인 손병희의 10만 군사와 힘을 합쳐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한때, 동학군은 중.남부 전지역과 함경 남도. 평안 남도에
까지세력을 폈으나, 공주.금구 싸움에서 패하였다. 전봉준은 순창으로 도망쳐 재기를
꾀하다가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1895년 3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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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1822~1846(손조22~헌종12)


우리 나라의 최초의 신부, 천주교 성인. 교명 앙드레. 본관 김해. 충청 남도 내포에서 독실한
천주교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천주교의 탄압을 피하여 경기도 용인의 골배 마을로
이사와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부모님에게서 천주교의 교리를 익혔다. 1836년(헌종
2) 프랑스 신부 모방한테 영세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양업, 최방제 등과 함께
중국의 마카오에 건너가, 파리 외방 전교회의 칼레리 신부로부터 신학을 비롯한 서양 학문과
프랑스어.라틴어 등을 배웠다. 그 후 마카오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1839년에 필리핀의
마닐라에 가서 공부하여 6개국어를 익히었다. 1842년(헌종 8) 프랑스 군함 제독 세실의
통역관으로 있다가 몇 차례의 실패 끝에 1845년(헌종 11) 고국을 떠난 지 9년만에 돌아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포교에 힘쓰다가 페레올 신부를 데려오기 위하여 쪽배를 타고 중국
상하이에 건너갔다. 거기서 탁덕으로 승품되어 24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 후 페레올.다블뤼 두 신부를 데리고 충청남도 강경을 거쳐서 귀국하였다. 그는
지방 전도에 나서 10년 만에 고향에서 어머니를 만났으나, 아버지는 순교한 뒤였다. 1846년
최 양업과 다른 신부의 입국을 위하여 비밀 항구를 찾다가 체포되었는데, 서울로 끌려와
40회에 걸친 문초를 받고 9월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우리 나라에 와서 직접 거행한 시성식에서 카톨릭의 성인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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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


조선 중기의 여류 시인. 기생. 진랑이라는 이름도 가졌고, 기생으로서의 이름은 명월이었다.
개성 출생. 중종 때 진사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문 공부를 하였는데, 시와 문장이 모두
뛰어났다. 가야금.거문고 등 악기도 잘 다루었고, 얼굴이 예쁜 것으로 더욱 유명하였다. 15세
무렵, 마을의 어떤 총각이 자기를 사모하다가 병들어 죽자, 충격을 받았음인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생이 되었다. 그 후 이름만 문인.학자들과 사귀며 뛰어난 글재주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의 대학자 서경덕을 자신의 재주와 미모로 유혹하려다 실패하고는
그의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청산리 벽계수야.','동짓달 기나긴 밤에...'등의
시조와 많은 한시를 남겼는데, 황진이와 서경덕, 그리고 박연 폭포를 아울러 '송도 삼절'이라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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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 1780~1812(정조 4~순조 12)


조선 후기의 민중 반란 지도자. 본관 남양. 평안도 용강 출생. 외삼촌 유학권에게서 한문을
공부하고 과거를 보았으나 낙방하였다. 관리 채용에 있어서 서북(평안도.함경도)출신에 대한
차별 정책과,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에 반감을 품고, 산에 들어가 병법을 연구하면서 시기를
기다려싼. 1800년에 우군칙. 정시수. 이희저 등 동지를 포섭하고, 가산 다복동을 본거지로
삼았다. 이어, 이제초, 김사용, 김창시 등을 참모로 삼고, 전국에서 불평 분자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811년(순조 11) 혹심한 흉년으로 민심이 어수선해지자 평서
대원수라 자칭하고 군사를 동원하여 난을 일으켰다. 먼저 가산군을 습격하여 군수를 죽이고
박천, 곽산, 정주,선천 등 8개 읍을 단숨에 쳐서 평안도 일대를 그의 세력 하래 두었다.
그러나, 평안도 병마 절도사 이해우의 군사 1천여 명과, 조정에서 급파한 군사가 안주에서
합세하여 공격해 오자 이들을 안주 교외 송림리에서 맞아 싸웠으나 패하여 정주로 물러갔다.
4월 19일 관군이 화약으로 성을 폭파하고 물밀듯이 몰려 들어가자, 동지들과 함께 전사하고
난은 평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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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1851~1894(철종 2~고종 31)


조선 말기의 정치가. 자 백온, 호 고균, 시호 충달. 본관 안동. 충청 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1872년(고종 9)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교리.정언 등을 지냈다. 박규수.오경석.유대치 등의
영향을 받아 개화 사상을 가지게 되엇으며, 일본에 다녀온 다음 일본의 힘을 이용하여 개화
운동을 꾀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서재필 등 유망한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시키고,
박영효.서광범.홍영식 등과 함께 개화당을 조직, 국가 개혁에 힘섰다. 1884년 12월 갑신
정변을 일으키고 새 내각을 조직한 후, 호조 참판이 되어 국가의 재정권을 쥐었으나,
3일천하로 끝나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0여 년간 일본 각지를 방랑하다가 1894년 상하이로
갔는데, 조선 정부에서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였다. 이듬해 김홍집의 건의로 죄가
용서되고, 순종 때 규장각 대제학으로 관위를 높여 주었다. 저서에 '갑신일록'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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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1879~1910


항일 독립 투사. 아명은 응칠. 본관 순흥.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한문과 무술을 익혔다.
1895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천주교 신자가 되고(세례명:도마), 프랑스 신부로부터 신문학과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에 홀로 평양에 가 석탄 상회를 경영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점을 팔아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세웠다. 1907년 한.일 신협약이 맺어지고 우리
나라 군대가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어서
1908년 전 제덕 밑에서 대한 의군 참모 중장 겸 특파 독립대장, 아령 지구 사령관으로서
엄인섭과 함게 1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경흥까지 진격, 일본군과 싸웠다. 그
뒤 노에프스키에 망명해 있는 독립 운동자들이 발간하는 대동 공보 탐방원으로 활약하면서
동료들에게 애국 정신을 고취하였다. 1909년 10월 침략자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중국 동북부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동지 11명과 손가락을 끊어
결사 보국할 것을 맹세, 우덕순, 조도선,유동하 등과 이강의 도움을 받아 일인으로 가장하고
하얼빈역으로 들어갔다. 기차에서 내린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군대의 군례를 받으며
모습을 드러내자 육혈포(권총)로 그를 쏘아 죽이고, 하얼빈 총영사, 궁중 내무 대신 비서관,
만철 이사등 일본인 관리들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본
관헌에 넘겨져 뤼순의 일본 감옥에 갇혀 6회의 재판을 받았으나 의연한 자세로 일본의 침략
행위를 캐어 따지다가 1910년 2월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6일 순국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나
옥중에서 글씨를 써서 남겼으며, '동양 평화론'이란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1962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현재의 건국 훈장 대한 민국장)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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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1917~1945



시인. 어릴때의 이름은 해환. 북간도 명동에서 태어났다. 용정의 은진 중학교와 평양의 숭실
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연희 전문 학교를 거쳐 일본 도시샤 대학 영문과 재학중 여름
방학때 귀국하다가 독립 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그가 죽은 뒤 1948년에 그의 동지들이 그가 남긴 원고들을 모아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사'라는 시집을 간행하였다.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오자 비로소 알려져 일제
말기의 저항 시인으로서 우명해졌다. 대표 작품으로는 '또 다른 고향'.'십자가'.'별 헤는
밤'.'슬픈 족속'.'무서운 시간' 등이 있으며, 연세 대학교 안에 윤 동주의 시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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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영 1855~1935


조선 말기의 의학자. 국어 학자. 자 공윤. 호 송촌. 본관 충주. 서울에서 태어났다.
1876년(고종 13) 수신사 김기수의 통역관으로 일본에 갔던 스승 박영선으로부터 일본인 구가
가쓰아키의 '종두귀감'을 전해 받고, 종두에 관심을 가졌다. 1879년 부산의 일본 제생 의원
원장이었던 마쓰마에한테 종두법을 배우고, 그해 겨울 충주 덕산면에서 한국 최초로 종두를
실시해 성공하였다. 1880년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 위생국에서 두묘(종두
때 쓰이는 병독) 50병을 얻어 귀국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일본에서 종두법을 받아들인
죄로 체포령이 내려졌으나, 몸을 피하였다. 1882년 전주, 1883년 공주에 각각 우두국을 설치,
종두를 실시하였다. 18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지평 등을 지내고, '우두신설'을 엮어 냈다.
1887년 사헌부 장령이 되어 정치를 바로 잡으려다가 미움을 사서, 한때 신지도로 귀양 갔다.
1892년 형조 참의, 1896년 동래 부사가 되고 주민들에게 종두를 실시하였다. 1899년 경성
의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10년간 의학 교육에 종사하였다. 국어의 보급에도 힘써 1905년
한글을 보급할 것을 상소하고, 1908 국문 연구소 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909년 '자전석요'를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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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1861~1922

독립 운동가. 천도교 교주. 초명 응구. 호 의암. 3.1 운동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사람. 충청
북도 청주 출신. 천도교의 3대 교주로 3.1운동을 지도했다. 서자로 태어나 양반들의 멸시를
받으며 자라나 1875년 15세 때 곽씨와 결혼하였다. 1882년, 최제우가 일으킨 동학에
들어가고, 7,8년 뒤에는 동학 교주 최시형의 수제자가 되었다. 34세 때 동학 혁명이 일어나자
북접 통령이 되어 동학군을 이끌고 나아가 싸웠으며, 1897년 37세의 나이로 동학의 3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 혁명이 실패하자 1901년 미국으로 가려다가 상하이를 거쳐 일본 도쿄로
갔다. 거기서 박영효.오세창.최인 등과 알게되어, 당시 기울어져 가는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1904년 진보회를 조직하였다. 1906년 46년 때 일본에서 돌아와 동학을 천도교를 바꾸고,
민족적 종교를 이끌어 갔다. 1914년 동덕 여학교를 맡아서 경영하였으며, 59세 때인
1919년에는 권동진.오세창.최인 등과 독립 운동 준비를 서둘러, 독립 선언서를 보성사에서
인쇄하도록 하였다. 그 해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 되어 태화관으로 가서
독립 선언식에 참석하엿다. 이로 말미암아 1920년, 3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 중 별장 상춘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현재의 건국 훈장 대한 민국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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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1904~1920

3.1독립 운동 때의 순국 소녀. 충남 천원군 목천면에서 태어나, 1918년 미국인 여자 선교사의
소개로 이화 학당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1919년 3월 1일,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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