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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지역의 독립만세 운동가들
글쓴이 : ansantour 날짜 : 2010-10-14 (목) 13:25





 




4. 안산에서의 3·1운동

3·1운동은 서울에서 봉기하여 전국 각 지방으로 확산되었는데, 그 과정을 살펴보면 3월 1일 당일에는 전국 주요 도시에서 일제히 봉기하였고, 이후에는 철도 연선을 따라 대도시에서 중소도시로, 그리고 읍·면·이(里)와 산간 벽지로 파급되었다. 그리고 각계의 운동은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반복되었으며, 지방의 대부분은 장날을 기하여 발생하여 5일, 10일 간격으로 되풀이되었다.

3·1운동의 주체는 예외는 있으나 주로 천도교와 기독교였으며, 이에 농민 계층이 가담함으로써 순식간에 전국적 민족운동으로 파급되었다. 처음 3월 상순에는 평화적인 만세시위로 전개되었으나 3월 하순에 들어서면서부터 점차 무력시위로 변해 갔다. 평화적으로 진행된 시위가 과격화된 이유는 일제군경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시위대의 감정이 격화된 때문이었다. 시위군중의 무차별 체포와 투옥은 시위대를 흥분시켰다.

군중들이 체포된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자 일제 통치기관은 시위군중에게 무기를 사용하였고 이로 인해 사상자가 발상하자 시위 양상은 무력시위로 전환되었다. 더욱이 시위군중에 대한 일본 군경의 발포는 군중을 극도로 자극하여 경찰서뿐만 아니라 면사무소·우편소 등 일제 식민통치기관을 습격·파괴·방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군중이 일제에 의해 희생되었다.

(1) 비립동의 독립만세운동
비립동(碑立洞)은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의 중심지로서 현재는 안산시 안산동 관내의 안산초등학교와 수암농협 사이인데, 이곳에는 역대 안산군수의 공덕비가 있어 흔히 ‘비립동(碑立洞)’이라 부른다. 이들 공덕비는 1988년 이곳에서 북쪽으로 3백여 미터 떨어진 과거의 안산동사무소 앞으로 옮겼다.

비립동 주변은 조선 시대 안산군 관아 및 시장(市場)을 비롯하여 가까운 인근에 향교(鄕校)·여단·사직단(社稷壇) 등이 있어 명실상부한 안산군의 중심지였던 관계로 이곳에서의 만세시위는 다른 어느 곳보다도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사진 2-1 비립동.
이곳에서의 만세시위는 다른 어느 곳보다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수암면의 19개 동리 약 2천 명의 주민들은 1919년 3월 30일 오전 10시를 기하여 각각 지휘자의 인도 아래 우선 집합장소인 비립동에 모여 만세를 힘차게 불러 기세를 올렸다. 당시 인도자는 유익수(柳益秀;부곡동 출신)·윤동욱(尹東旭;산현동 출신)·윤병소(尹秉昭;능곡동 출신)·홍순칠(洪淳七;와동 출신) 등으로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이끌고 경찰관주재소·보통학교(현 안산초등학교)·향교 등을 돌았다.

유익수는 월피동 집에서 성포리 구장이 인솔하는 시위행렬과 함께 비립동까지 갔는데 이때 성포리 구장이 “여러 사람이 모였으니 폭동이 일어날지 모르오. 만일 주재소라도 습격하면 큰일이오. 귀하가 알아서 군중을 지휘하면 염려가 없을 것이오.” 하였다. 유익수는 군중을 지휘하여 읍내 도살장까지 갔다. 이때 왜경이 “읍내로 들어가지 말고 해산하라.” 하였으나 유익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군중 앞에 서서 읍내로 들어가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날 홍순칠은 임학신(林學信)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자기 마을 사람들 30여 명과 함께 읍내로 들어왔다. 한편 윤동욱은 산현리 주민들과 같이 읍내로 들어가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다가 보통학교(현 안산초등) 앞에서 순사 임건호(任健鎬)를 만나자 “너도 조선 사람이니 만세를 불러라. 관리가 부르면 군중이 따라간다.” 하며 강요하였으나 임건호는 끝내 불응하였다 한다. 또한 김병권(金秉權) 등 화정리 주민 30여 명도 이 날 만세를 불렀다.

(2) 거모리의 독립만세운동

거모리(去毛里)는 현재의 시흥시 거모동으로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의 서촌(西村)이었고, 일제 때에는 학교·면사무소·금융조합·시장·우체국 등 군자면의 행정 중심지였다.

1919년 4월 4일 원곡리(현 원곡동) 출신인 강은식(姜殷植)은 이곳에서 집합한 수백 명의 군중을 격려해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또한 죽률리(현 죽률동) 출신 김천복(金千福)은 이 날 자기 마을 주민들에게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기 위해 거모리에 있는 면사무소 앞으로 모입시다!”고 권하여 주민 수십 명을 모아 거모리로 향하였는데 이때 일경의 총소리를 듣고 군중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강은식은 나머지 2,3명과 함께 거모리에 이르러 면사무소 및 주재소 부근에 집합한 수십 명의 군중에 가담해 조선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쳤다.

이틀 후인 4월 6일 장현리(현 장현동) 출신 권희(權憘)의 집에서는 ‘비밀통고’라는 제목 아래 군자면 전 마을 주민들에게 “이제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래로 받은 10년 간의 학정에서 벗어나 독립하려 한다. 우리들은 이를 기뻐해 4월 7일 군자면 거모리 구시장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려 한다. 각 이민(里民)들은 태극기 1개씩을 휴대하고 모이라.”라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하고 모임 장소를 그림으로 그려 회람을 돌리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계획한 만세시위는 와해되었다.

(3) 반월 장터의 독립만세운동
반월(半月) 장터는 현 반월동사무소가 있는 마을이다. 1919년 반월면에서의 만세운동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 후인 4월 1일에 있었다. 반월 장날을 기하여 수천 명의 군중이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시위를 하였다. 시위 군중은 3개조로 나누어 동으로는 군포장(현 안양시 호계동, 구 군포), 북으로는 구룡동(현 안산시 일동 구룡 마을), 서로는 본오리·범실·들목으로 나누어 행진하면서 만세시위를 하였다.

이들은 시장 한복판에서 만세시위를 하면 좁은 시장 바닥이 수라장으로 변할 것을 우려해 제각기 시골로 퍼져 시위를 시도하였다. 또 시장 안에는 주재소와 면사무소 등이 있어 쉽게 진압당할 염려도 있고 하여 멀리 떨어진 곳을 선택해 시위를 감행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30분 만에 각지에 도착해 꽹과리·북·징 등 농악을 울려 시위 분위기를 돋우었으나 경찰과 당시 반월 면장이 간곡한 어조로 설득함으로써 해산하고 말았다. 이 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왜경에게 쫓기게 되었고 만세운동의 총책인 김순봉은 여러 곳을 떠돌며 은신하던 중 끝내 자수하고 말았다.

(4) 대부면의 독립만세운동

대부면(大阜面)은 현재 안산시 대부동이다. 대부면의 김윤규(金允圭)·노병상(盧秉相)·홍원표(洪元杓) 등 3인은 1919년 3월 31일 대부면 영전리(營田里)에서 만나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결의하고 이 날 밤 11시 김윤규의 집에서 포목으로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 다음날 오전 3시경 집 밖으로 나가 독립만세를 외치니 이곳 주민들이 합세하여 권도일의 집 앞에서 태극기을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후 위의 3인은 체포되어 각각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사진 2-2 대부동 삼일만세운동기념비.
1982년 4월에 김윤규ㆍ노병상ㆍ홍원표 3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비립동 만세운동을 비롯하여 안산 각 지역의 만세운동의 특징은 우선 조국을 다시 찾자는 대의명분이 무엇보다도 크지만, 한편으로는 과거 고려·조선 시대를 이어 온 1천 년 역사의 안산(安山) 지명을 일제가 1914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말살함으로써 그 울분이 5년 후인 1919년 3·1운동에 함께 폭발한 점도 생각할 수 있겠다.

(5) 안산 3·1운동과 관련된 사항

1) 삼일로
이 도로 명칭은 안산시 승격 전 반월출장소 당시에는 ‘광덕로’라 계획되었었다. 광덕산 기슭을 지나간다고 광덕로라 하였던 것인데 1985년 안산 신도시의 전체 가로명을 처음으로 명명하면서 ‘가로명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재검토하게 되었다. 즉 당시 처음 계획하였던 ‘광덕로’를 ‘3·1로(三一路)’로 개칭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그 도로가 광덕산 기슭을 지나간다고 막연히 광덕로라 명명하기보다는 이 광덕로가 안산에서는 가장 중심지를 통과하는 중요한 도로이므로 이 지역의 역사성이 부각되는 측면에서 도로 명칭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당시 가로명제정위원회의 한 사람이었던 유천형(柳天馨)이 ‘3·1로’로 명명·제의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3·1로’가 통과하는 지점이 월피동인데 이곳 월피동은 안산 지역 3·1운동을 주동하였던 애국지사 유익수(柳益秀) 선생의 생가가 있었던 곳이자 주요 활동무대였기 때문에 3·1운동의 역사성을 부각시키는 차원에서 ‘3·1로’라 명명하게 된 것이다.

2) 삼일초등학교

이 학교 개교 당시(1991.5.6 개교)의 교명은 ‘수암초등학교’였다. 그러나 수암(秀岩)이란 지명은 원래 한일합방 이후 1914년에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시 생겨난 지명이며, 또한 수암면이 안산시에 편입됨으로써 수암이란 지명은 역사성에 비추어 볼 때 별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초등학교가 위치한 월피동은 애국지사 유익수 선생의 생가가 있었던 곳이며 ‘3·1로’가 지나가는 지역이다. 따라서 학교의 명칭을 역사성과 연관지을 수 있는 3·1초등학교로 바꿔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킬 것을 당시 안산교육청 설영태 교육장에게 유천형(柳天馨)이 건의하여 ‘삼일초등학교’라 개명하게 되었다(1992.4.28 개명).

3) 노적봉

원래 이 산의 이름은 노적봉(露積峯)이었다. 즉 조선 시대 지도에는 엄연히 노적봉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일합방 이후 일제에 의하여 1914년 지도가 새로 제정되면서 가사미산으로 산 이름이 변경되었던 것이다. 「동국여지승람」 안산군지편을 보면 안산의 수리산(修理山) 정기가 남쪽으로 흘러 10리 밖에 말봉을 이루니 그 산이 노적봉이라 하였다. 아마도 일본인들은 그러한 산의 정기를 말살하려는 측면에서 노적봉이란 이름을 말살하고 아무 뜻도 없는 가사미산으로 개명한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노적봉은 과거 안산 지역 주민들이 매년 풍어제를 지내던 당집이 있었던 산이며, 3·1운동 당시에는 안산 지역 청년들이 밤을 새워 가며 태극기를 그리던 산이다. 따라서 광복 50주년을 맞이한 그 해(1995년)에 일제가 말살한 고유의 산 명칭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역사의식에서 유천형이 행정 당국에 건의하여 가사미산이란 명칭을 버리고 역사적 이름인 ‘노적봉’을 다시 찾게 되었다.<1994년 9월 15일자 정부고시>

1912년 안산보통학교(현 안산초등학교)가 개교되면서 일제 총독부는 일제 침략의 수단으로 초대교장에 일인(日人) 교장 하야시(임호장으로 후에 개명)를 임명하였다. 초대교장으로 부임한 하야시는 학교 업무와 병행하에 안산향토사를 면밀히 검토하여 총독부로 보고하였는데

내용인 즉 ‘안산은 고려 초 9대 임금 덕종, 10대 정종, 11대 문종이 탄생한 지역으로, 안산의 진산은 수리산이며 그 정기가 남쪽으로 흘러 10리 밖에 말봉을 이루니 그 산이 노적봉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일제는 우리 민족 말살 차원에서 1천 년 역사의 안산 지명과 함께 수리산 정기의 말봉인 노적봉도 1914년에 같이 말살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풍수설을 철저히 믿었던 그들이라 안산보통학교 교장 하야시는 정년 퇴임 후 수리산 정기의 말봉인 가사미산(현 노적봉) 밑에 집을 짓고 살다 사망하였다 한다.


(6) 안산 3·1운동의 주요 인물
 
1) 유익수(1870년<고종 7년>~1926년)
유익수(柳益秀)는 안산시 부곡동에서 유형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수암면·군자면, 수원군 반월면(半月面) 등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30일 수암면 동부의 이봉문(李奉文), 중부의 김병권(金秉權), 북부의 윤동욱(尹東旭)·강경식(姜敬植) 동지와 합세하여 수암면·군자면의 각 동리 주민 2천여 명을 인솔하여 대한독립만세라 쓴 깃발과 태극기를 앞세워 만세를 부르며 시위하였다. 군중들은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유익수의 주도 아래 각처를 돌며 해산 명령을 하는 일경(日警)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시위를 계속하였다.

다음날인 3월 31일에도 그는 반월면에서 수암·군자면의 동지 1백여 명과 함께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는데, 이 날은 마침 장날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였고 그 여세를 몰아 군중들은 남양(南陽)까지 들어갔다. 시위가 격해지자 군중들은 돌과 몽둥이를 들기로 하였으나 유익수는 “건물이나 기물(器物)은 모두가 우리 민족 재산이니 하나라도 파손되면 안 됩니다.”라고 외치면서 평화적인 시위를 지휘하였다. 또한 그는 성포리(현 성포동) 노적봉 정상에서 청년들에게 철야로 태극기를 만들게 하였고 사재(私財)를 털어 동지들과 군중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사진 2-3 부곡동 유익동 묘역. 1983년 8월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이후 그는 1919년 4월 5일 수암면 월피리(현 월피동) 자택에서 일경에 체포되었고 5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일본인 변호사의 주선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1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는 출옥 후 병석에서 6년간 고생을 하다가 1926년 5월 29일 사망하였다. 1983년 8월 31일 정부에서는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고(건국훈장 애족장) 이로써 안산시 부곡동에 있는 묘역도 정화하였다.

2) 최승만(1897년<광무 1년>~1984년)


















사진 2-4 최승만. 고잔동 당골 출신의
2ㆍ8독립운동에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최승만(崔承萬)은 안산시 고잔동 당골[堂谷] 출신의 독립운동가·언론인·교육가이다. 1915년 보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1917년 일본 동경관립외국어학교 노어과(露語科)에 입학하였다. 그는 당시 동경 유학생 중 지도적 위치에 있던 최팔룡(崔八鏞) 등과 1918년 여름방학 때부터 자주 만나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추진, 마침내 1919년 2·8독립운동을 거사하는 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1918년 동경에서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위원, 이듬해 「창조(創造)」 동인(同人)으로 활동했고, 1922년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의 기관지 월간 「현대(現代)」의 주간(主幹)을 지냈다. 1930년 미국 스프링필드 대학에서 B·S학위를 취득하고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 기관지 월간 「청년(靑年)」의 주간을 지냈고, 1934년 「신동아(新東亞)」의 잡지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36년 8월 일장기 말소사건(日章旗抹消事件)으로 퇴직하였다.

해방 후에는 1945년 미군정청 교화국장, 1948~1952년 연희대학교 교수로 활동하던 중 1950년 한국전쟁으로 처와 세 딸이 납북되었다. 1951년 제주도지사, 1952년 제주대학 초대학장을 거쳐 1954년 이화여자대학교 부총장을 역임하였다. 1962년 대한소년단 부총재, 1962년 중앙여고 이사, 1963년 감사를 지내는 등 교육사업에 투신했고, 1966년 동경에서 한국기독교청년회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귀국, 1984년 12월 25일 87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3) 홍순칠(1878년<고종 15년>~?)
홍순칠(洪淳七)은 안산시 와동 출신으로 1919년 3월 30일 이 일대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시위에서 그는 유익수(柳益秀) 등에게 태극기를 전하기도 하면서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섰다.

홍순칠은 심문조서에서 “금년 3월 30일 유익렬(柳益烈)의 하인 임학신(林學信)으로부터 그날 독립만세를 부르니 수암면 비립동으로 모이라는 취지의 통지을 받고 허치선(許致善)의 집에 모여 거기서 30인을 인솔하고 남쪽 밭에 이르니 이미 1천3백 명 정도의 주민이 모였다.”고 진술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독립을 희망하는 사람으로서 독립을 하려면 많은 사람이 모여 시위운동을 할 필요가 있다.” 하고 29일 국유지 소작인들에게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가 되니 이때 만세를 부르는 것이 득책이다.”라고 하여 소작인들을 선동하였다. 아울러 그는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인원을 조사하였는데 그 이유인즉 불참한 사람을 문책할 자료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후 그는 체포되어 같은 해 5월 7일 경성복심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4) 강은식(1855년<고종 22년>∼?)
강은식(姜殷植)은 안산시 원곡동 출신이다. 그는 평소 조선 독립을 희망하고 있었는데 손병희(孫秉熙) 등이 조선 독립 선언을 하자 그 취지에 찬동하여 정치 변혁의 목적으로 1919년 4월 4일 군자면 거모리(去毛里)에 있는 면사무소와 경찰 주재소 부근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하였다. 그는 운집한 수백 명의 군중 속에 들어가 국기을 흔들며 군중을 격려하였다. 그후 그는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5) 홍원표(1875년~1962년)
홍원표(洪元杓)는 옹진군 대부면 동리 출신이다(현 안산시 대부동). 홍원표·김윤규·노병상 등 3인이 1919년 3월 31일 대부면 영전리에서 만나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결의하고 이 날 밤 11시 김윤규의 집에서 포목으로 태극기을 만들고 그 다음날 오전 3시경 집 밖으로 나가 독립만세를 외치니, 이곳 주민들이 합세하여 권일도 집 앞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후 3인은 체포되어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6) 김윤규(1894~?)
김윤규(金允圭)는 홍원표·노병상과 같이 대부동 동리 출신이며, 3·1운동 당시 활동 사항은 홍원표와 같다.

7) 노병상(1891~?)
노병상(盧秉相)은 홍원표·김윤규와 같이 대부동 동리 출신이며, 3·1운동 당시 활동 사항은 홍원표와 같다.

8) 김수웅(1895년<고종 32년>~?)
김수웅(金秀雄)은 안산시 부곡동 출신이다. 그는 시흥군 능리 지도원으로서 태평양전쟁 당시 1945년 2월 중순 자기 집 앞에서 암촌무웅(岩村武雄) 외 1명에게 “어떤 사람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최근 부산 상공에 미국 비행기 B-29가 내습하여 금년 4월 중에는 조선의 징용이 폐지된다는 선전 삐라가 다수 살포되었다고 한다.”라는 취지의 말을 하여 민심의 소란을 유발하는 허위 사실을 유포하였다고 하여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안녕질서 파괴를 시도한 혐의로 형법 제105조 3항, 형법 제25조에 의하여 징역 6월에 처해졌다.

9) 윤병소(1893년~?)
윤병소(尹秉昭)는 시흥군 수암면 능곡리 출신이다. 그는 1919년 3월 30일 유익수와 함께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을 지휘·인솔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10개월을 선고받았다.

10) 윤동욱(1891년~1968년 7월 30일)
윤동욱(尹東旭)은 시흥군 수암면 산현리 출신이다. 그가 1919년 3월 30일 능곡동 사람으로부터 “비립동에서 만세를 부른다.”는 소리를 듣고 그곳으로 갔을 때는 이미 약 1천 명 정도의 군중이 모여 있었다. 그때 순사가 “해산하라! 그러지 않으면 읍내로 갈 때는 발포할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모인 군중 속에서는 해산하자는 자도 있었고 하지 말자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선두에 서서 군중의 기세를 돋우며 읍내의 주재소·보통학교·면사무소 등의 앞에 이르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후 그는 체포되어 경성복심원으로부터 태형 90도에 처해졌다(표창장 제100916호

고 윤동욱. 위는 숭고한 애국정신을 발휘하여 조국의 자주독립운동에 헌신노력함으로써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바 크므로 이에 표창함 1996년 8월 15일 대통령 김영삼. 총무처장관 조해녕).

11) 김병권(1878년~?)
김병권(金秉權)은 시흥군 수암면 화정리 출신이다. 1919년 3월 30일 화정리 주민 30여 명이 모여 있기에 그 이유를 물은즉 “만세를 부르기 위하여 비립동으로 간다.”고 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왜 구장에게 의논도 하지 않고 경솔한 행동을 하느냐?”고 꾸짖었다. 하지만 격문 속에 “집합하지 않으면 방화한다.”고 있었으며 “후한을 피하려면 부디 오라.”고 하였으므로 그들이 폭행 등을 하지 않도록 감독하는 뜻으로 비립동으로 갔더니 약 1천 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 그는 군중 속에 섞여 순사의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읍내를 행진하여 주재소·보통학교·면사무소·공자묘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그후 체포되어 경성복심원으로부터 태형 90도에 처해졌다.

12) 권희(1900년~?)
권희(權憘)는 시흥군 군자면 장현리 출신으로 1919년 당시 서당 생도였다. 그는 손병희(孫秉熙) 등이 일본 통치의 굴레를 벗고 조선국을 수립하려는 뜻을 외친 이래로 각지에서 조선독립운동이 왕성하다는 것을 전해 듣고 이에 찬동하여 동리에서 역시 많은 사람들을 선동해 1919년 4월 6일 자기 집에서 ‘비밀통고’라는 제목 아래 모임 장소를 그림으로 표시하고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래로 받은 10년간의 학정에서 벗어나 독립하려 한다. 우리들은 이 기쁨에 대하여 4월 7일 구시장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같이 부르려고 한다. 각 이민(里民)은 구 한국기 1개씩을 휴대하고 모이라.”는 취지의 문서를 작성·회람시켰다. 그후 그는 일경에 체포되어 같은 해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13) 장수산(1899년~?)
장수산(張壽山)은 시흥군 군자면 장곡리 출신이다. 그는 1919년 이웃 마을 권희가 작성한 ‘비밀통고’문을 같은 마을의 구장인 조카 이종영의 집 앞에 놓아 두고 각 이민들에게 회람시킴으로써 많은 사람을 선동하였다고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14) 이봉문(1890년~?)
이봉문(李奉文)은 시흥군 수암면 수암리 출신이다. 그는 1919년 3월 30일 수암면 면민이 수암리에서 만세를 부를 때 군중 속에서 솔선하여 만세를 불렀다. 그후 일경에게 체포되어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15) 김천복(1897년~?)
김천복(金千福)은 시흥군 군자면 죽률리 출신이다. 그는 1919년 4월 4일 자기 마을 주민들에게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기 위하여 거모리에 있는 면사무소 앞에 집합하라.”고 권하여 이들을 선동한 후 주민 수십 명을 모아 거모리로 향하였다. 그때 일경의 총소리를 듣고 군중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그는 2,3명과 함께 거모리에 이르러 면사무소 및 주재소 부근에 집합한 수십 명의 군중에 가담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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