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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훈님의 문화논단1] 최 용신 연구에 있어서의 근원적 오류
글쓴이 : ansantour 날짜 : 2008-08-27 (수) 03:23
문학에 대해 삼성문화사 국어대사전은 학문․학예․시문(詩文)에 관한 학술, 작자의 상상․감상을 통하여 독자에게 호소하는 언어예술로써 미적 가치를 지니는 정신적 산물의 총칭, 인간의 정신을 풍부하게 한다는데 있어서 소중한 것임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넓은 뜻으로는, 법률학․정치학․자연 과학․경제학 등의 학문 이외의 학문을 통틀어 이르는 말, 좁은 뜻으로는, 정서와 사상을 상상의 힘을 빌려 문자로 나타내는 예술 및 그 작품이라고 말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상록수』라는 소설은 실재 사건을 모델로 했다고 하더라도 문학작품인 이상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픽션(fiction) 즉 사실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이나 묘사와는 달리 가공의 인물이나 이야기를 구상하는 허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에 반해 역사는 기록하는 방식에는 다소 차이기 있지만 사실[팩트(fact)]을 그대로 전하는 것을 생명으로 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분단으로 하나의 사건을 한 눈에 파악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지만 편년체의 서술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근래에 들어 만들어진 새로운 문학 장르인 '팩션(Faction)'은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의 요소를 적절히 이용하여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인물의 이야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여 새로운 사실을 재창조하는 문화예술로서 자리 잡고 있으며 주로 영화, 텔레비전드라마, 연극 등에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최 용신 연구자들의 주장처럼 소설『상록수』가 아무리 사실에 근거하여 쓰였다고 하더라도 팩션(Faction)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겠다. 여기에 대해 소설에 표현되는 것 이상의 정열적인 활동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 역시『상록수』라는 소설이 인기를 얻고 난 후 거기에 연루된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지니게 되는 ‘자신을 널리 알리고 싶어 하는 욕구’에 대한 검증이 부족하고, 특정인들에 의해 선양의 목적에서 채록된 증언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사실적 근거로 보기에는 분명한 한계 있다. 앞으로 연구자들은 이에 대한 보완이 반드시 필요하다.

왜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답변에 앞서 그동안 무슨 이유에서 인문학의 가장 기초지식에 해당하는 소설[픽션(fiction)]과 사실[팩트(fact)]을 구분하지 않고 있는가? 에 대한 반문을 던져본다.

첫째 소설에서 나오는 시대적 배경은 작가가 이야기를 구성하기 위해서 허구로 설정해놓은 하나의 무대이며 그 무대를 배경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일련의 사건들을 충실하게 전개해 나갈수록 작품의 완성도는 높아진다. 따라서 상록수의 작품성이 뛰어나다는 것은 주인공 최 용신이 아니라 작가의 소설구성이 탄탄하다고 보아야 한다. 반면 역사는 일어난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으므로 기록자에 따라 관점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픽션(fiction)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최 용신 연구자들은 하나 같이 최 용신이 활동했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함에 있어서 소설이 설정하고 있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사람은 소설 밖으로 끌어내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소설 안에서 해야 된다는 전도몽상이 아닐 수 없다.

‘독립유공자 추서 청원’에는 “심 훈의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으로 농촌계몽운동의 선구자 채 영신은 이미 전국에 알려졌고, 교육되고 있습니다.”라고 전제하고 소설에서 표현 된 것 보다 더 열심히 애국운동을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최 용신은 일본말이 서툴러 경찰서는 자신이 담당했으며, 출두하면 종일 기다리게 하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대나무로 어깨를 치면서, 왜 가르치지 말라는 성경과 조선어를 가르치느냐고 훈계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는 그때마다 김 활란의 핑계를 대었다고 하는󰡓 황 종우의 증언과는 사뭇 다른 표현이라 하겠다.

둘째, 소설의 내용이 문제가 있어서 사실적 기록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며,『최 용신양의 생애』를 집필한 유 달영 역시 당시를 회고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최 용신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조선의 여인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록의 처음부터 부잣집 딸이었던 최 용신을 가난한 집 딸로 묘사하면서 기록 전체를 픽션화시키고 있다. 그의 증언을 들어보자.

최 양의 생애는 참으로 간단하거든. 간추리면 4-5페이지 정도만 쓰면 생애를 전부 수록할 수 있을 거야. 그때 최 양은 참, 목숨 내걸고 일했어요. -중략- 이 전기는 최 용신 전기로뿐만 아니라 우리 조선 여성들에게 주는 애절한 편지 스타일로 썼어요. 불과 2주일 동안에 문필가가 아닌 내가 전기를 쓴 것과 또 전기를 편지체로 쓴 것은 그때까지는 없는 일이죠.

최 용신양이 여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시골 강습소에서 3년 동안 교사로 열심히 일하다가 죽었다는 것이 내용의 전부였지. 삶의 스토리가 그렇게 간단해. 내가 조선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최 용신양의 생애를 내걸고 편지로 피력한 것이지.

위에서 보듯이 이미 유 달영은 최 용신의 전기를 쓰라고 지시한 김 교신과 함께 어떤 목적에 이용하기 위해서 집필했음을 의심해 보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유 달영이 말하는 조선민중의 계몽과 긍지를 위해서라는 이유는 소설이 설정하고 있는 역사적 배경 안에서는 합당하나 실재(實在)하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유 달영 · 심 훈 · 최 용신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일본에 적극동조 하여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경제시장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시작된 미국의 선교식민지전략에 대한 비판이나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국선교사들 대부분이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시켜서 교회를 이용해 조선민중의 독립의지를 꺾었고 오히려 일본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묵과하고 있다. 이것은 최 용신의 활동이 독립운동으로 평가받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다루지 않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셋째, 그의 인품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것은 그가 독립운동가 또는 민족주의자인가에 대한 평가와, 그가 벌였던 농촌계몽운동의 본질이 무엇이었던가를 알아보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유 달영의 기록에 따르면 최 용신은 흔치 않은 수재(秀才)였으나 마마자국으로 얼굴이 몹시 얽어 현대여성들이 꿈꾸는 ‘스위트 홈’의 환상을 철이 들자 말자 단념했고 이것이 결혼보다는 민족운동을 해야겠다는 결심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교회신앙이 자리 잡은 뒤에는 얼굴에 대한 괴로운 심사를 버렸고, 외모보다는 정신적 아름다움을 키워나가던 중 그 뜻에 부합하는 K씨를 만나 결혼을 약속했다고 한다.

이미 어린 시절 여성으로서 넘기 힘든 정신적 갈등을 이겨낸 것이 훗날 그의 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고 보이나 이 때문에 생긴 마음의 상처 또한 그의 성격 형성에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소설과 유 달영은 매우 독실한 신앙인으로 표현하고 있고 그것에 대한 근거로 중앙대 김 호일교수는 그가 벌였다는 교내스트라이크 사건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녀가 3학년이던 1931년 4월 교내 동맹휴학 사건이 일어났다. 문제는 교장 케이블(Cable. E. M. Rev)이 채플시간에 눈을 뜨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학생들이 항의 데모를 했던 것이다. 이 항의 데모에 독실한 신자였던 최 용신이 주동자였던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학교를 그만두고 농촌에 투신했다고 적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신앙인이 아니므로 결론지어 평가 할 수 는 없지만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문제가 있다. 가장 유치하게 말한다면 둘 다 기도시간에 눈을 떴다 감았다 했거나, 아니면 최 용신의 신앙이 깊어 눈을 감고도 기도시간에 일어난 사실들을 훤히 보았다든지...,...,. 다시 말하면 교장선생님은 직위 상 채플시간에 수업의 진행효과를 알아보기 위해서, 꼭 눈을 감고 기도하라는 규칙이 있다손 치더라도 눈을 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 용신은 그것을 문제 삼았다, 그렇다면 최 용신에게 있어서 스승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이해되는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이 “조선민중의 독립의지를 꺾고 있었던 당시 미국의 선교식민지전략에 대한 비판”이 없었다는 지적과 함께 최 용신의 계몽사상을 규명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초가 된다고 보인다. 여기에 대해 최 용신이 가르쳤다는 노래 구절과 그가 붉은 줄을 그어가며 읽었다는 성경구절을 적어본다, 이것이 독립운동과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는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충분히 검토되어야 한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느님 주신동산, 이 동산에 할 일이 많아 사람 부르네.
※. 한반도라는 말은 일본이 의도적으로 인식시킨 단어임

내 언론함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고운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냄과 권능으로 하여 너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느님의 권능에 있게 하였노라.
(신약성서 고린도 전서 2.4-5)

과연 민족정신이 생생히 살아있는 민족주의자가 당시 ‘팔뚝 같은 조선 반도는 흉기와 같아 일본 안전을 위협하였다’라고 왜곡하기 위해 사용했던 ‘조선반도’라는 단어를 가르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이 땅의 모든 권세는 하늘이 정한 것이니 순종하라”(평양대부흥회를 기점으로)는 성경 구절을 이용하여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했던 선교사들과, “너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느님의 권능에 있게 하였노라”고 했던 최 용신의 소명의식은 어떤 개연성이 있을까하는 것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넷째, 이 부분은 최 용신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므로 조심스럽게 접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본고에서 제기하고자 하는 중요한 핵심 부분이므로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다루고자 한다.

최 용신과 일본 형사와의 관계에 있어서 임의 또는 강제 연행이 없었다는 점을 의식해서 인지 최근 일부사람들이 “기록은 없지만...,..., 최 용신이 일경에 불려가 여자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고초를 당했다”라는 억지증언을 삽입하고 있는 것은 깊이 의심해 볼 대목이다.

이와 아울러 최 용신의 활동에 있어서 일본이 탄압했다는 가장 확실한 근거라고 말하는 것은 당시 샘골 교습소의 학생이 110명에 달했으나 일제는 시설이 좁고 불편하다는 이유를 들어 정원을 60명으로 제한했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문제제기는 자칫 일본에 동조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사실규명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최 용신 연구자들은 하나 같이 샘골 교습소의 건축비 내용을 상세히 공개하고 있지만 나로서는 학원의 규모에 대해서 언급한 기록을 아직까지 찾아볼 수 없었다. 따라서 60명의 학생을 오전. 오후로 나누어 지도했다고 하는 연구자들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그 규모를 짐작 해보거나, 아니면 건축비를 당시 물가로 환산해서 알아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아래 유 달영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교실이 한 칸이 아니었나 싶다.

교실에는 벽마다 글씨와 작문과 그림과 수예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3월 중순에 입학을 지원하는 아동들은 예상 이상으로 많았다. 교실에 수용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백열 명을 수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교실은 최대 110명을 수용 할 수 있으나 60명을 정원으로 허락 받았고, 60명을 또 다시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 가르쳤다는 것이 된다. 오후반 수업 뒤에는 동네에서 야학을 했고 또다시 10 여 리 떨어진 동리를 찾아가서 새벽까지 글을 가르쳤다는 일과에 비추어 본다면 일제가 지적했다는 협소한 시설의 문제는 나름대로의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이번에는 수원고농(현 서울 농대)과 염 석주에 관한 문제이다. 수원고농과 염 석주는 최 용신을 후원하며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유 달영의 기록에 따르면 수원고농이 샘골에 자금을 지원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기독교를 좋지 않게 보는 학생들과 사상적으로 민족주의와 대별되는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학생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자신이 나서서 특정종교를 뛰어 넘어 민족을 위한 것이라고 설득하여 지원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위의 기록은 후에 다루는 염 석주와의 관계를 접어 두더라도 다음과 같은 문제를 스스로 지니고 있다. 농촌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은 민족이라는 의식에서 시작되는 일이다. 그런데 사회주의자들을 민족주의자와 대별시키고 있는 것은 이해 할 수 없는 일이고, 당시 독립운동으로 이름을 떨치던 수원고농의 항일활동에 사회주의의 입장에 있던 학생들이 참여한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해명이 없다. 이러한 입장은 종교인으로서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본다. 민주(民主) 공산(共産) 사회(社會) 등등의 주의(主義)는 개인과 집단 간에 있어서 사회구현에 대한 이상의 차이 일뿐 국가관과 민족의식에 있어서는 종교 보다 우위에 있는 더욱 확실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원고농학생들이 샘골의 지원을 반대했다는 것은 당시부터 최용신의 활동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다음은 사회장으로 치러진 최 용신의 장례 위원장을 맡았던 염 석주에 대해서 역사문제연구소「일제하 사회운동색인집」의 내용을 정리해본다.

염 석주는 1930년대 경기지방의 신간회 간부로 활동했다. 그는 30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부호였는데 부친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토지를 팔거나 저당 잡혀 그 대금으로 만주에 토지 60만평을 마련했다. 그 후 안산지역에서 인부 100여명을 이주시켜 경작케 했고 수확한 곡식을 독립운동군의 군자금과 군량미로 제공했다. 당시 경기지역의 독립운동 책임자로서 활약했던 그는 몽양 여 운영과 친밀한 관계가 있었고 여 운영은 수차례에 걸쳐 수원<막고지>을 직접 찾아와서 비밀회담을 가질 만큼의 영향력이 있었다고 한다. 일경에 체포되어 18일 간의 심한 고문 끝에 광복 1년을 앞두고 동대문 경찰서에서 순국했다.

위와 같은 염 석주의 활동이 아직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은 여 운영과 관계를 가졌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으며, 일각에서는 해방 이후 생겨난 이데올로기의 갈등 속에 생겨난 사회주의자를 배격하는 정서 때문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대부호였던 그가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내어놓은 것은 사회주의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따라서 샘골의 가장 확실한 후원자이자 당시 안산 지역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염 석주 활동으로 미루어 볼 때 수원고농 학생들이 샘골의 지원을 반대했던 이유가 사회주의의 입장 때문이라는 유 달영의 기록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연구자들은 이 문제와 함께 박 정희 정권에 적극 동조했던 유 달영의 행보에 대해서 반드시 규명해야 한다.

다섯째, 소설에 표현되는 것 이상의 헌신적인 노력을 했다고 말은 하지만, “내가 조선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최 용신양의 생애를 내걸고 편지로 피력한 것이지”라는 유 달영의 회고록에서 보듯이 ‘젊은 신여성이 기득권을 포기하고 농촌에 와서 고생했다’는 미사여구 이외에는 별다른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조선에서 양대인(洋大人)이라 불리며 본국에서 보다 훨씬 나은 대접을 받는 서양선교사들이 천국 같은 고향을 등지고 한국에 와서 고생하는 것이라고’ 착각했던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그대로 옮겨온 듯하다.

사실적 근거의 부족은「안산문화」13권 권두언의 필자 유 천형의 글에도 나타나고 있다. 우리고장의 신간회 애국자 염 석주와 최 용신을 더 연구 선양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최 용신에 대한 근거로 항일독립단에 군자금을 보냈다는 황 에스더의 영향과 염 석주와의 친분을 강조 할 뿐 정작 최 용신의 활동에 대한 사실적 근거를 제시 없이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며, 최 용신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는 이유는 일본형사 오야마가 청년들을 이용해 방해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제하에서 고등계 형사 오야마가 샘골에 거주하면서 왜 염 석주, 최 용신을 계속 감시했단 말인가 ! 이는 두 분이 다 애국지사였다는 증거다. 그러면 이와 같은 애국지사가 이 사회에서 어찌 조명되지 못하고 왜곡 내지는 평가 절하되어야 하는가.

최 용신은 오래된 인물이 아니라 당시의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 지금도 현존하는 최근의 인물이다. 그러함에도 사실적 근거를 명확히 밝히지 못하며 왜곡된 이유를 일본형사에게 돌리고 있다. 그리고 위의 글뿐만 아니라 최 용신과 함께 교사활동을 했다는 홍 찬의 역시 일본경찰이 “일주일에 한 번씩 무엇을 가르치느냐고 심문조사를 하였다” 라고 하고 있고, 다른 증언에서도 아예 일본형사가 샘골에 상주하면서 감시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임의동행 내지 강제연행은 한 번도 없었고, 단 한 번 반월주재소의 출두명령에 응했다고 한다. 이것은 참으로 묘한 여운이 남는 대목이다.

위의 의문을 덮어두더라도 소설보다 훨씬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는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자신을 농촌에 묻기로 각오한 최 용신이 2년 여 만에 떠난 일본유학의 이유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선진문물을 배워서 농촌운동을 열심히 하려했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약혼자와의 연락 두절, 그리고 부친의 병환과 오빠의 이혼과 샘골의 자금난 등이 부차적인 구실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유 달영은 약혼자 김씨의 유학비용을 최 용신이 걱정했고, 그러한 것들이 최 용신의 요절과 관련이 깊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샘골의 지원했던 ‘여자기독청년회’가 자금지원을 멈춘 것이 미국에서 지원하던 자금이 부족해서 생긴 것이라면, ‘미국의 선교식민지전략’과는 무관하다는 분명한 이유를 찾아내어야 하고, 1940년대쯤에 일본 기독교단체의 산하로 들어가게 되는 것에 비추어 이등박문 이후 변화된 일본의 대 기독교정책과 샘골과의 관계변화를 면밀히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근래에 들어 대표적인 친일파로 분류되는 김 활란과의 관계 규명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여섯째 아래 기록을 살펴보면 역사적 관점의 순수성이나 민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최 용신이 활동했던 샘골 이외에 다른 곳의 농촌운동이 오히려 더 높이 평가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최 용신이 소설에서 보다 더 열정적이었다는 대목에서도 다시 한 번 새겨 볼 만 한 일련의 사건들이다. 여기에 대해 안산시사의 기록을 옮겨본다.

1920년대 경기지역에만 200여 개의 청년단체가 조직되어 야학과 민족의식 고취 및 독립운동을 했다. 이 기록은 당시 동아일보에 소개된 것들이다. ①1926년 수암면 수암리- 엄 이섭. 정 상시. 성 희경이 안산공립보통학교 교장의 협조로 안산청년야학을 열어 30명의 어린이를 무보수로 가르침 ②군자면 죽율리에는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학령기가 넘은 아동들과 무산아동들에 대해 동네교회를 빌려 교육을 했으나 아동수가 늘어나자. 1927년 문 창영의 발의로 안 희택이 대지 150평을 기부하고 80여명의 동네유지들이 기금을 마련하여 1928년 6월 10일 초가 13칸의 교사를 준공했다. 그러나 이해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문을 닫게 될 지경에 이르자 1929년 1월 유지들은 야학운영 기금을 마련키 위해 ‘금주단연(禁酒斷煙)운동’을 벌이고, 군자 면민들을 대상으로 강연회 등을 개최하여 ‘금주단연’과 ‘야학운영’이라는 이중의 효과를 얻었다.
또한 민족의 기둥이 될 소년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의지를 불어주자는 운동의 일환으로 ④1927년 6월 ‘능곡소년회’가 조직되었고, 12월에는 죽율리에서는 김 규영 등을 주축으로 ‘죽율소년회’가 창설되어 지역중심의 토론회와 야학활동을 벌였다.

위의 기록들에서 본다면 당시 이 사회에서 순수한 목적에서 운영된 야학과 농촌계몽운동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미국의 식민지전략과 친일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과 관계가 깊은 샘골의 이야기가 소설이 아닌 실재(實在)로 평가되는 데는 분명한 문제가 있을 것 같다.
일곱째 위의 지적에 덧붙여 최 용신의 유적이 1978년 12월 경기도의 위촉에 의해 문화재관리국, 서울대, 경희대 등으로 구성된 ‘반월지구유적발굴조사팀(위원장 유해엽)’이 작성한 보고서에 누락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를 안산시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유인 즉 1984년 4월 13일 반월 출장소에 의해 설치된 ‘반월문화재발굴위원회’의 위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였고, 또 최 용신을 괴롭혔던 일제시의 오야마를 추종하던 인사들이 지역유지로 위원회에 참가하면서 과거의 반성은커녕 오히려 최 용신을 냉대하고 격하시켰으며 심지어 상록수역 명칭도 반대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해방 이후 친일세력들이 계속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상록수 정신은 왜곡되고 평가절하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앞서 연구자들이 소설이 설정한 역사적 배경을 벗어나지 않고 소설과 사실을 구분하려는 노력이 없다는데 대해서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함을 지적했다. 그러한 현상은 여기에서도 나타난다. 최 용신의 활동이 높이 평가된다면 ‘상록수 정신’이 아니라 ‘최 용신의 정신’을 선양해야하고 역명(驛名) 역시 최 용신의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지명과 역명의 논쟁에 있어서 인명(人名)을 사용하면 여러 가지 이견을 잠재울 수 없어서 불가피하게 소설의 명칭을 선택했다는 뒷이야기를 상기해보는 대목이다.

위의 주장대로 상록수 정신을 선양해야 한다면 소설 속의 주인공인 채 영신을 실재 인물인 최 용신으로 둔갑시키는 일은 없었어야 했다. 그리고 당시는 일본군장교 출신인 ‘박 정희 정권’ 직후였고 박 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정책 중에 하나인 ‘새마을운동’이 농촌계몽운동인 ‘상록수 정신’을 계승한다는 입장에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다. 시간이 지난 지금 친일에 대한 평가가 과거와 달라지고 있으므로 이 문제는 다시 연구되어야 한다.

그리고 유해엽씨와 친분이 깊었던 지인의 증언에 따르면 ‘반월지구유적발굴조사팀’이 최용신 유적을 누락시켰던 것은 앞서 제시한 자료들에서 보듯이 최용신의 농촌운동은 규모와 노력면에서 특별한 점이 없었고 당시 시대적 요청에 의해서 벌어졌던 일반적인 일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증언은 앞서 제시한 자료에 비추어 보아도 그 신빙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지금까지도 소설의 탄탄한 구성에서 배어나는 ‘상록수 정신’과 ‘최 용신의 활동’을 혼돈하고 있거나 의도적으로 구분을 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고 있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작게는 한 개인에 대한 평가이지만 크게는 역사적 기록이 된다는 사실을 상기했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의 근대사 대부분이 그렇지만 샘골의 사실적 평가는 과거사가 온전히 정리된 다음에 재평가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성급하다고 본다. 또한 상록수 정신을 소설 속에 있는 그대로 선양한다 해도 ‘종교가 가지는 한계인’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분명한 문제들이 있고 더구나 주인공인 채 영신을 끌어내어 역사적 인물인 최 용신으로 둔갑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폭넓은 연구와 논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심 훈의 소설『상록수』가 사실과 다르다는 이유로 유 달영이 저술한『최 용신양의 생애』역시 팩션(Faction)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데 대한 문제는 어떻게 해결 할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마지막으로 당부 드리는 것은 어떤 인물을 폄훼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바르게 알아보자는 입장에서의 주장이다. 그리고 과거사를 정리할 후대 사람들에게 1984년 당시 최 용신의 평가에 대한 반대가 분명히 있었고, 2007년에도 그들과는 다른 입장에서 의문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두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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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은 상록수최용신선생을 오랫동안 연구해 오신 김명옥님이 안산시청에 올리신 글입니다. 상록수최용신선생의 추모사업에 제자분들과 직접 참여하고…
12-31 2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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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재선, 잘 사는 도시, 시민행복도시, 돈버는 도시, 국제화도시, 시민국가도시, 관광선진도시, 생산적 복지, 국제선진화 도시 - 되고 싶으면 이렇게 바꾸자…
12-24 2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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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광안산! | 2004.07.03. 01:47  // 시장님의 미국기행문을 자세히 읽어보았습니다. 안산시의 시급하고도 당면한 현안문제들…
12-13 5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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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ntet Gem With Astor Piazzolla - 11월 26일 연주 1부|정문규미술관.com 조회 28 |추천 0 |2011.11.27. 19:16 http://cafe.daum.net/imsan2/N3jD/57&nb…
12-03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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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설명 상 : 안산화랑유원지에 조성공사가 진행중인 가족캠핑장부지 위치도중 : 대부도 방아머리해변을 찾은 관광객들이 해양쓰레기더미 속에 파묻혀 있…
12-01 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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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도에 가면 소년 "정문규"가 살고 있다. 200여일을 달리는 대부해솔길(大阜海松道) 開拓의 長道를 앞두고 안산시 관광해양과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공무원들과 …
11-25 2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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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목), 전문기관과의 공동연구 최종보고회 개최 경북도, 관광산업의 새로운 전기마련을 위해 경북 스토리텔링 관광상품 개발 계획을 발표하고, 유일무이한…
11-03 2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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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http://woojoo87.com/menu/menu[52].html?num=1081&page=1&pg=52&sort=read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걷기가 유행이다. 제주도 올레길엔…
10-25 3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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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이구희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달려라 하니’ 한국 대표스타 만들 것” '성내 하니공원’ 숨은 주역 윤주 와이쥬 크리에이티브 대표 …
09-22 2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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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린 예덕상무사 부보상놀이공연 장면. 부보상들이 장사하며 벌이는 각종 타령이나 놀이 등을 모아 마당극 형태로 재편성해 만든 부보상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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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1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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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화/대부 뉴스 송산검객 조회 18 |추천 0 | 2011.09.05. 12:47 .bbs_contents p{margin:0px;} //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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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상단-시화호 물빼기 관경사진아래 : 호주서남부에 위치한 해양관광도시 퍼스시에는 바다와 호수가 어우러져 다양한 수상레저가 발달해 있다. "바다기…
09-01 3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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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 다운되지 않을 경우, 이메일로 신청가능 - gscity@naver.com              &nb…
09-01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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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마케팅 연구자료 - 축제 브랜드화를 위한 메뉴얼개발소스 [문화비평]안산거리극축제, …
08-20 2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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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올림픽기념 관광지소개 1~9] 현대 "왕공" 혼례식관광 중국 북경올림픽을 맞아 약 50여만명…
08-12 2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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